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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Aug 13. 2023

걸어서 20층까지

태풍이 지나가고


 태풍이 지나간 목요일 저녁,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다 잘 밤에 밖에서 큰 소리가 나길래 뭔가 했더니 태풍과는 딱히 상관없는 이유로 문제가 생겼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뭐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지, 그때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에 혹시나 해서 평소보다 5분 정도 일찍 나갔는데 엘리베이터 두 대의 층 표시 등이 꺼져 있었다. 우리 집은 2n 층이다. 늘 문이 닫혀 있던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 잠이 덜 깬 아기를 안고 남자분이 (벌써) 지친 표정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허둥지둥 그분을 따라나섰는데 8층쯤 오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날 저녁 일이 있어서 서울에 온 남편과 회사 근처에서 만났다. 여전히 엘리베이터를 수리 중이라는 공지를 확인하고 일단 생선구이 백반을 먹기로 했다. 옆 테이블에 소주병을 본 술꾼(나)은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오늘도 다사다난했는데... 한 잔 하까?"

 "아니, 일단 밥을 먹자."

 "응... 우리 오늘 집에 갈 수 있을까?"

 "음... 밖에서 자까?"

 서울에서 잘 일이 있으면 종종 가는 호텔에 방이 있는지 확인했다. 

 "오, 있다! 자, 그럼 체크인 하고 삼겹살을 먹을까~ 막창을 먹을까~"

 "안 돼, 요새 너무 방탕하게 살았어. 집에는 가야 해."

 지난달에 주말마다 야구 보러 다니느라 흥청망청 살았으므로 잠은 집에서 자야 할 것 같았다. 결국 생선구이만 먹고 바로 기차를 탔다. 


 집 앞에 와서도 괜히 마트를 기웃거리며 한참을 서성였다. 1년 반 넘게 살면서 우리 집이 이렇게 높아 보였던 적이 없다.

 "그래도 금요일니까... 맥주 한잔하고 들어갈까?"

 "좋아!"

 반건조 오징어에 맥주는 왜 이렇게 맛있을까. 하지만 2n 층까지 걸어 올라가려면 실컷 먹을 수 없었다. 딱 한 잔씩 마시고 나온 우리는 걸어 올라가면 아무래도 시원한 게 또 생각날 거라는 선견지명으로 편의점에서 맥주 네 캔을 샀다. 그리고 한밤중 2n 층 등산을 시작했다. 


 묵묵히 계단을 오르던 남편이 14층에서 멈췄다.

 "하, 나 종아리가 너무 땅겨. 먼저 가."

 "어떻게 그래. 좀 쉬었다 가자."

 습한 날씨 때문에 둘 다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20층이 넘어가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역시 서울에서 잤어야 했나, 후회가 밀려올 때쯤 집에 도착했다. 다음 날 일어나니 허벅지와 종아리가 쑤셨고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고장이었다. 2n 층에 고립돼 주말을 보낼 수 없었던 우리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야구도 보고(?) 하룻밤 밖에서 자고 오기로 했다. 바리바리 짐을 싸서 2n+1층을 걸어 내려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남편의 두 시간짜리 공포영화보다 무서운 한마디.


 "나, 차 키를 안 가지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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