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롱 Feb 25. 2024

여보, 우리는 어쩌다 닮아서

널 닮은 나


 스물둘에 동갑내기 남자 친구를 만나 10년 넘게 연애하고 결혼해서 곧 마흔을 앞두고 있다. 며칠 전 밥을 먹다가 문득 깨달은 놀라운 사실.

 "여보, 우리 몇 년 더 있으면 인생의 절반을 같이 보낸 거다?"

 "엉? 그런가?"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는 탄식 같은 감탄을 뱉고 낄낄 웃었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연애 중반까지 성격이 불같았던 나는 남편을 닮아가면서 제법 여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언제나 느긋한 남편을 보면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요즘은 웬만해선 뛰지 않는다. 늦으면 늦었는갑다, 놓쳤으면 다음 차 타지 뭐, 정도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화가 나면 일단 불을 뿜었는데 지금은 이게 화낼 일인가? 이 정도로? 잠시 생각한다. (물론 생각한다고 무조건 화가 사그라드는 건 아니다.) 남편은 엉덩이에 뿔 난 망아지를 사람 비스무리한 것으로 키워냈다.


 안타깝게도 좋은 것만 닮지는 않았다. 입이 텁텁한 음식을 먹고 나서 마시는 콜라 한 잔의 맛을 남편에게 배웠다. 나는 원래 탄산음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새는 자꾸 후식으로 톡 쏘는 시원한 걸(?) 먹고 싶다.

 또 남편은 등이나 팔을 긁어줄 때(<남편은 맨날 등이 가려워> 참고) 너무나 행복해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도 자꾸 등이 가렵다. 

 "여보, 나 등 긁어줘. 위에, 위에, 손톱으로 빡빡."

 "여기 뭐가 났는데?"

 "등드름도 옮나 봐."

 "무슨 소리야."

 등이 가려울 때 남편이 옆에 없으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내 등이 자꾸 가려우니 남편 등을 조금 더 성의껏 긁어주게 되었다.


 하나 더, 남편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더위를 많이 타는데 같이 살다 보니 자꾸... 덥다. 원래 추위를 많이 타고 심지어 맨살에 찬바람을 맞으면 두드러기가 나는 체질이었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추운 걸 잘 못 느끼게 됐다. 대신 더위를 많이 타고 조금만 더워도 땀을 흘린다. 요약하면 나는 남편을 닮아가면서 약간 느긋해졌지만 콜라를 좋아하고, 등이 가렵고,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 된 것이다. 

 반면 남편은 나를 만나고 콜라를 덜 마시게 됐다고 한다. 최근에 내가 사다준 고급 보디워시를 쓰면서 등도 좀 덜 가렵다고 한다. 밤에 잘 안 먹는 내 덕분에 야식도 많이 줄었다고. 그리고 달라진 또 한 가지.

 "여보, 춥다. 보일러 틀자."

 "안 추운데? (트렁크 차림의 남편을 보며) 옷을 입어."

 "아니야, 추워. 보일러 틀자. 오늘은 따꾼하게 해놓고 자고 싶어."

 "...여보도 춥다는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츄워, 츄워~"

 아침에 극세사 이불을 폭 덮고 자는 남편을 보면서 우리 이 정도면 사이좋게 나이 먹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 


 우리 집에는 똥손 두 명이 사는데 똥손1에게 사과 예쁘게 깎는 재능이 있다는 걸 최근 발견했다. 덕분에 똥손2는 아침마다 사각사각 사과 씹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 

 여보, 이건 안 닮아서 다행이다, 그치? 내일도 부탁해 (하-트)


매거진의 이전글 붕어빵 낚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