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돈에 대한 생각이 오고 가면서 부자에 대한 많은 책을 접했었다. 누군가가 자기 계발을 읽은 다음은 심리학을 읽을 테고, 그다음은 인문학, 철학 마지막은 종교서 일 거라고 했는데... 나도 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처음 시작은 자기 계발, 즉 부자가 되는 책 들이었다. 돈, 돈, 돈, 지긋지긋하지만 돈이 있어야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주어진다. 그래서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지에 대해 미쳐있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현재 세상에서는 얼마 이상의 돈은 숫자임에 불구하다는 것을 깨우쳤고,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벌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 모든 것은 우주에서 행해 주는 행동이니, 돈이 필요하면 그때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교환의 가치를 돈의 가치로 변경해 오면 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교환의 방법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교환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 현재는 마사지 학교를 다니려고 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고서 내 삶들이 누군가의 프로그래밍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세상이 악이라고 생각되었고, 사람들 또한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내가 지옥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도 해 보았다. 삶과 죽음 중 죽음이 이 악하고 힘든 세상을 깰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하인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마라.
그가 밤에 날 죽일지도 모르니깐.
by 볼테르
종교 또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 되고, 인간은 탐욕적인 존재 일뿐인데, 과연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좋은 것인가? 우리는 평생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받고 있는 것 아닐까?
그 해답을 찾고 싶어서 책을 읽는 모임을 나가기도 했다. 두 곳에 갔었는데, 내 똘기 있는 생각과 비슷한 사람은 찾지 못했다. 책을 읽는 행동으로 본인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으스대는 사람들도 보였고, 남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비판적으로 우울하게 생각할 때라,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고 어두웠다.
그 시기에 모든 사람이 싫어졌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고 집에 처박혀서 책만 읽고 삶과 죽음의 문 턱 앞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책임질 아이들이 있었기에, 동굴에 들어가지 못한 채 현실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옛날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악한 행동들이 눈에 들어오며 내 정신세계에 바람을 불어 대니,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과대망상증인가?
정신 분열인가?
본인은 타인을 위해서 희생을 하지 않으면서, 타인은 본인을 위해 희생을 하길 바라는 사람들을 보며 화가 났다. 하지만 이내 곧 나 또한 타인의 희생을 바라고 나를 희생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악마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습게도 악에 대한 생각은 나 또한 악임을 깨닫고 나서 끝났다.
나는 인간은 '나'라는 박스를 보호하며 살아가야 하기에, 그 보호하는 행동이 이기적인 행동으로 발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호랑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냥 신이 호랑이에게 그런 삶을 부여해 준 것뿐이다. 사람 또한 타인의 희생으로 자라는 것이고, 그 자연스러운 행동을 이기적이라고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나쁘다고 생각을 하는 것뿐이다.
암컷 사마귀가 수컷 사마귀를 잡아먹어도, 수컷은 번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암컷 연어는 산란의 시기가 오면 몇 백, 몇 천 KM가 되는 바다와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산란을 하고 죽는다. 암컷이 많이 죽으면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여 산란을 하기도 한다.
몇몇의 벌레들은 다른 벌레에게 알을 낳아서 애벌레가 다른 벌레의 몸을 먹고 자라게 만든다.
인간 또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마리의 생명을 앗아간다.
나도 오늘 달걀 프라이 2개를 먹었으니, 태어나지도 못한 두 마리 닭의 생명을 앗아갔고, 저녁에 감바스를 해 먹을 생각이니 10마리 새우의 생명을 앗아간 살해범이자 포식자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우리가 말한 도덕적이거나 이성적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간다.
그냥 이게 자연의 이치일 뿐인 것 아닐까? 인간은 왜 자연적인 이치를 '악'한 행동이라고 칭하여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되게 만들었을까? 누구를 선하거나 악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지만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해 중독이 되어 살고 있어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어 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나에게 이익이 돌아오면 선이고 해가 돌아오면 악이 되는 것인데, 한 인간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외의 것은 모두 다 악이다.
친구와 점심을 먹는데 오늘은 내가 사기로 했다. 나는 어제 가고 싶지 않은 팀 회식에 끌려가서 어쩔 수 없이 과음을 했기에 라면을 먹으며 해장을 하고 싶은데, 친구는 3만 원짜리 뷔페를 가자고 한다. 나는 그 친구가 허영심이 많고 나쁘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친구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전에 만났을 때는 내가 스테이크를 사줬는데, 자기가 살 때에는 라면을 먹자고 하고, 오늘 나와의 약속이 있는데 과음을 하고 나온 그 친구가 예의 없고 나쁘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상황이 있고 본인이 선이라고만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은 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타인은 항상 지옥이다. 이 지옥이라는 생각을 탈출하게 해 준 것은 철학과 인문학 책이었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가 쓴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인간 삶의 허무함을 접하게 되었다. 변호사든 판사든 왕년에 얼마나 잘 나갔느냐와 상관없이 늙고 병들면 죽음 밖에 반겨주는 것이 없다. 당연한 이야기들인데, 이 당연한 것을 모르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았으니, 정말 어리석은 삶을 살았었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나 혼자 스페셜하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었는데, 나는 이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소크라테스, 세네카, 칸트, 니체... 이런 사람들이 생각을 하던 문제를 지금도 생각하고 있으니, 현재와 과거 중 어디가 더 발전한 것인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종교 책을 접해야 하는데, 아직 깊게 가지는 못했지만 성경보다는 불경이나 베다 경전이 더 와닿는다. 종교에 관심을 쏟으면 가느다랗게 남아있는 자본주의 세계 현실의 끈을 놓을까 봐, 아이들을 성인까지 키운 후 즐기려고 아껴두고 있다.
이렇게 6년 동안 정신이 변화하며 여행을 하고 있다.
나는 타인이 보기에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 그 결정은 나의 행동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결정된다. 다른 이가 목이 마를 때 혼자 물을 마시는 것도 악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고,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악이 될지 선이 될지는 모른다. 그런 걸 생각하는 자체가 피곤하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서 교류하는 것이 나에게는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천성으로 인해 얇고 넓은 관계는 계속된다.
오늘도 놀이터에서 마케도니아에서 이민 왔다는 두 아이의 엄마 Angela 가 연락처를 나누자고 했다.
오히려 말이 깊게 안 통하고 문화가 다른 외국인이 편하다. 서로를 악과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다름'이라고 생각을 할 뿐이니, 기대할 것도 오해할 것도 없다.
내가 준 것을 기억하지 말고,
내가 받은 것을 기억하라.
요새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그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를 이 문장을 통해 해결짓는다.
주고받는 것은 어찌 보면 생존과 연관이 되어 있어, 가장 예민한 부분이다. 타인과 교류를 할 때에는 무엇인가 오고 가야 한다. 지혜, 노하우, 정보, 기쁨, 재미, 안도감, 행복감이 될 수도 있다. 꼭 그것이 물질일 필요는 없다.
처음에는 이 문장을 내가 준 것을 기억하지 말고 타인에게 받은 것을 고마워하라는 소리인지 알았다. 그렇기에 계속 남에게 주어야 되는지 알았다. '남에게 주어라.'라고 해석을 한다면, 성인군자도 힘든 일을 어찌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행하라고 하는가?
내가 다른 이에게 얼마큼 정성을 들여, 무엇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내가 결정한 문제니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1:1로 주고받으려고 한다면, 정말 피곤하고 멍청한 짓이다. 모든 사람이 악으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핸드로션을 선물했다고 하자, 하지만 그 사람은 핸드로션을 바르는 일을 귀찮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럼 그 사람의 관점으로는 내가 쓰레기를 선물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본인이 타인에게 선물하는 것은 훌륭한 것이라고 확대를 하고 타인이 나에게 선물한 것은 필요 없는 것이라며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이 준 것에 대해 자세히 관찰을 해보면, 그 사람의 그릇을 알 수 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도 있고, 누구에게 선물 받은 자신이 필요 없는 것을 주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주는 사람이 있고, 비싼 음식을 사서 주는 사람도 있고,직접 만든 음식을 주는 사람이 있다. 비 물질적으로는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거나, 안정감을 주거나 소속감을 주거나, 유쾌한 시간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이 주는 사람의 그릇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 달에 200만 원 버는 사람에게 소고기를 사주었는데, 동일한 금액의 선물을 주지 않는다고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소고기를 받은 사람은 물건에는 기뻐했을지 모르나, 부담감과 죄책감까지 함께 받았을 수도 있다. 인간은 부담감과 죄책감을 타인으로부터 받으면, 미움의 감정이 나온다. 그것이 질투이고, 어쩌면 소고기를 주고 질투와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 사람의 그릇이 작아 타인에게 받을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편이 낫다. 특히 물질적인 것은 조심해야 한다. 여유가 없거나 결핍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악이고 감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선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것을 주었는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살펴 봐야한다. 결핍이 많은 사람은 내가 아무리 주어도 충족 시킬 수 없다. 그러니 멀리하라.
악으로 가득 찼던, 내 삶에서 빠져나와 생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감사하는 법'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공부 중 수학, 영어, 과학, 사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감사'다. 오늘 내 삶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도움을 주고 희생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면, 평범한 내 하루가 굉장히 특별해진다. 아침에 산책을 하면서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감사하고, 내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친구들에게도 감사한다. 내가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전기와 통신을 만들어 준 수많은 사람들도 감사하고, 오늘 하루 편안한 집에서 잘 수 있는 내 상황에 감사한다. 혼자 있었으면 라면만 먹었을 텐데 내가 음식을 할 수 있도록 함께 있어주는 가족들에게도 감사한다. 하루에 5시간씩 놀이터네 나가서 햇볕을 쐬게 해주는 아이들에게도 감사한다. 정말 아이들이 없었으면 심심한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감사를 시작하면서 악으로 가득 찼던 내 삶이, 행복과 감사로 가득 찼다.
내 삶이 왜 악과 불안으로 가득 찼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면, '돈'이라는 것이 내 인생에 자욱한 안개를 뿌렸었다. '자기개발' 책이라는 매개체로 인해 내 삶을 부정했었고, 돈 이외의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게 하였다. 우리 아이들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태어난 아이들이 아닌데, 그들을 경쟁에 떠밀고 불행하게 만들 뻔했다. 남과 경쟁을 하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경쟁이 아닌 성장을 해야 한다. 하지만 밖에서 보면 경쟁이든 성장이든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아이러니하게 다시 자기개발 책을 보고 있다. 몇 년 전에 읽었던 것과 똑같은 책인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니, 이번에는 나를 채찍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책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문제였다.
나는 선한 사람일까? 악한 사람일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보는 사람의 관점일 것이다. 그래서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내가 착하고 호구 같은 짓을 해도 보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나는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소고기를 사주어도 욕먹는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남의 생각과 감정에서 인정을 받으려 노력 하지 말고, 내 생활을 하는 것이 현명한 길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