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노동을 ‘인간이 수행하는 보편의 활동’ 이라고 정의 했다.
노동은 한마디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해야할 활동이다.
돈을 버는 활동 뿐만 아니라 밥을 차리는 것도 노동이고, 빨래를 하는 것도 노동이고, 청소를 하는 것도 노동이고. 아이를 돌보는 일도 노동이다. 하루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노동을 통해 희노애락을 겪는 인간인데, 요즘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아무도 노동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
가족 모임에서 아무도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차라리 더 비싼 비용을 내고 음식점에 가지,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며느리는 시댁에서 설거지를 하면, 내가 초라해 지는 것 같고 기분이 상한다. 시어머니도 이는 마찬가지다. 며느리가 있는데, 시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꼴이 우습다면서, 기분 나빠한다. 자기 주장이 강한 어떤 시어머니는 대놓고 표를 내서 며느리가 시댁에 오기 싫어 하게 만들어 버린다.
멀리서 보면, 누구든지 하면 되는 일이고, 수 많은 세월동안 이어져오던 일인데, 요상하게도 현대인에게는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일들이 작은 가시가 되어 큰 상처를 만든다.
청소하는 사소한 일 또한 그러하다. 역사상 이렇게 소유물이 많은 세대가 있었을까? 부유해짐으로 인해 소유물이 많아진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거나 정리 하는 것보다도 끊임 없이 사들이는데에 촛점을 맞추어 살아간다. 지금 사지 않으면 큰일 날 것 처럼 물건을 결제하지만, 막상 도착하면 박스 속에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귀찮아서 뜯지 않은 택배 상자는 일주일이 지나도 문 앞에 방치 되어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공동체라는 의식이 희미 해지고 '나' 라는 자아가 강해졌다. 특히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로 돈으로 환산하기 애매 한 것들의 가치를 하락 시켰다.
그 첫번째 희생양은 가장 중요한 '집안 일'과 여성의 '인권' 이었다. 노동력을 확보 하기 위해 집에 있는 여성들도 돈을 받는 일자리로 스스로 오게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여성의 권리라고 포장을 하여,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는 여성은 저학력, 무능한 사람 더 나아가서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성장에 가장 필요한 '가정'을 한 순간에 망가트렸고, 여성은 평등을 외치며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시장에 내놓았다.
"의미 있는 삶"
"훌륭한 사람"
"성공한 삶"
"자아 실현"
이런 단어들은 사람들에게 교육되어 지고, 마치 이런 것을 쫓지 않으면 실패한 삶으로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한 삶이 아닌 그냥 삶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바쁘게 채찍질 했다.
김춘추 시인의 꽃처럼, 하나씩 이름을 붙여서 의미를 부여하고 꽃으로 만들어 현실과 거리가 먼 상상을 그리고 나니, 자아라는 괴물은 인간의 실의 삶을 숨쉴 수 없게 눌러버리는 결과를 초래 했다.
이제는 그 자아가 가면이 되어 MBTI 가 되어 깊이 없는 감옥에 나를 가두어 버렸다.
생명력은 생산 활동에서 나오는 것인데, 소비만 강조한 사회는 무엇을 생산하기가 두려워진다. 먹고, 사고, 보고, 컴퓨터의 스크롤을 내리고, 리모콘의 버튼을 누르는 행동만이 안전하게 느껴진다.
생산은 위험, 불확실성, 실패 가능성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안정만 추구한다.
배달 어플로 음식을 시켜 먹는 대신, 가스 불을 키고 볶음밥을 만들어 보자. 작은 화분을 사서 씨앗을 심어보자. 거창할 필요도 없다. 화분이 없으면 집에 남는 박스에 흙을 담아 와서, 깻잎이라도 심어 보자. 원하는 디자인의 옷을 만들어보자. 옷이 힘들다면, 실을 사와서 목도리라도 만들어 보자. 아이의 머리를 잘라주고, 남편의 흰머리를 염색해 주자.
처음에는 실망하는 결과를 보게 되겠지만, 딱 10번만 반복해보자.
내 실력이 늘어가는 것을 느끼고, 결과의 뿌듯함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노동이 하기 싫어졌던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무서웠던 것은 아닐까??
타인에게 존중 받지 못할까봐, 무시당할까봐, 초라해 보일까봐, 두려워서 피한 것은 아닐까?
그 공포가 쌓여서 작은 노동초자 위험한 도전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럼 우리의 공포를 극복하게 해줄 열쇠는 무엇일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 열쇠는 '사랑'이었다.
사랑이 있으면 실패하는 것도 두렵지 않다. 나를 믿어 줄수 있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아픈 우리들에게는 필요하다. 하지만 가정이 파괴된 지금 시점에서 부모가 주어야 했던 사랑을 타인에게서 획득하는것은 어렵고, 나에게서 충족시키기에는 쉽지 않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 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내려 준 '신'이 나를 사랑하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슬프지만 한국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때 많은 것을 잃었다. 그중 하나가 '신'이다.
천주교, 기독교, 불교, 흰두교, 이슬람교, 우주를 믿든 무엇이든 상관 없다.
신은 나에게 햇볕과 물과 공기와 시간과 먹을 거리, 입을 거리 등 대부분의 것을 제공한다. 모든것은 무료이고 다시 갚을 필요도 없이 끊임 없이 내려준다는 것을 생각하고 살면, 세상에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
나의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아무도 칭찬하지 않아도, 아무도 읽지 않아도, 아무도 몰라줘도.. 이게 나에게 내려진 일이라 생각하면서 오늘도 혼자만의 뿌듯한 노동을 한다. 김치를 담그고, 삼계탕을 끓이고, 상추를 심고, 깻잎을 심으며 그리고 마사지를 하며, 지긋지긋 했던 노동에 탈출하고 싶어했던, 바라고 바다던 파이어족을 그만 둔 채, 다시 노동으로 돌아간다.
이제 더이상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거나, 부모님에게 비싼 저녁을 사지 않을 것이다. 메이커 옷을 사거나 가방을 사고 뿌듯해 하지 않을 것이다. 돈에서 벗어나 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사랑하는 손님들을 위해, 이웃을 위해, 내 에너지를 나누고 더 해줄 수 있는 것을 찾는 여정이 이 다음 여정이 될 것 같다.
여담으로 우리 아파트에 사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 도베르만을 키우기 시작했었을 때, 상당히 놀랬었다. 자기 몸도 힘들텐데, 저렇게 큰 개를 어떻게 키우려고 하는지 멍청한 걱정을 했었는데, 항상 마약에 취해 몽롱하던 사람의 눈이 또릿또릿 해졌고, 마주치면 대면대면하던 사람이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청소를 하다가 문득 밖을 바라보니 눈길에 개를 데리고 나와, 담배를 한대 피더니 주위에 다른 사람이 놓고간 강아지 똥을 줍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사랑할 것을 찾으니 사람이 달라지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나왔다.
우리가 노동을 피하고, 생산을 두려워하고, 작은 일조차 초라하게 느껴졌던 건 결국 사랑할 대상이 없거나,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삶을 변화 시키고 싶다면, 집착이 아닌 사랑할 것을 찾아야 하는 것 같다. 모두들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