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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니카 Jul 19. 2024

당신봄날 아침편지92

2024.7.19 안도현 <공양>

하지를 기점으로 어둠의 부채살은 아주 조금씩 넓어집니다. 일정한 시간에 학생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직업이라, 낮과 밤의 길이를 살피는 감각이 조금은 남다르지요. 이제 초복이 지났고 태양의 열기가 가장 맹렬한 팔월 한여름이 남아 있어서, 왠지 낮의 길이도 여전할 것처럼 생각되지만 여지없이 낮은 줄어들고 밤은 길어지는 길목을 매일 지나갑니다.    

 

오늘 새벽에도 느꼈습니다. 저를 찾아온 새벽의 옷차림은 분명 어제보다 더 무겁고, 어두운 장삼의 날개로 휘날렸습니다. 방의 불을 바로 켜지 않고, 가만히 이 새벽의 어둠을 받아들여 보았습니다. 저녁을 준비하는 어스름의 모습과 새벽을 일깨우는 어스름의 정도는 미묘하게 달랐습니다. 아직은 마음만이라도 젊게 살고 싶어서 저는 새벽의 미명에게 ‘고운정’ 한 표를 던집니다.     


어제 대찬 장마비 기세를 앞세운 강풍이 책방 앞 팽나무를 어지간히 힘들게 했습니다. 창밖으로 무심히 내다보고 있는데, 후배가 찾아오고, 또 다른 손님들이 그 비를 뚫고 왔더군요. 책방손님으로 다녀가신 분께서 친구분들과 함께 와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서울에서 독서팀 ‘필리아’를 통해 친구들의 우정을 돈독히 쌓고 있는 분들이랍니다. 감사의 인사로 시집 한 권씩을 드렸고, 아침편지 애독자를 희망하셔서 더욱더 기뻤습니다.     


안도현 시인이 이런말을 하더군요. “나의 시는 어떤 의미를 꼭 달아서 쓴 것이 아닌데, 교과서에 실린 순간부터 의미를 달고, 주제를 달고, 형식을 달고 익혀지고 있더라”고요. “그냥 읽혀지면 읽고, 읽혀지지 않으면 덮었다가, 나중에 보게 되면 또 읽으면 되는데...”라고요. 생각해보니, 특히 생각과 행동에 의미두기를 중히 여기는 저 같은 사람은 ‘안 읽힐 때 내려놓은 빈틈’부터 익혀야 되는데, 그게 잘되지 않아서 늘 골칫거리이지요.^^      


어제의 비바람을 온전히 다 받아내는 팽나무 가지와 잎들, 작은 화분에 위태롭게 앉아 있는 수국의 헝클어진 머리칼들, 한송이 남은 장미꽃잎일당백 정신에 결국 비바람이 항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그냥 받아주는구나. 따지지 않고 원망도 하지 않고 받아주니, 결국은 이기는 거구나’를 눈치로 알았습니다. 저도 어느 작가의 말처럼 ‘눈치’는 고단수니까요.~~     


오늘도 오락가락 갈팡질팡 장마비가 내리는 군요. 타 지역의 비 피해소식에 염려와 걱정의 마음도 모아주고, 너무 혼자만 즐기는 불금보다는 혹여라도 있을 어려움에 귀 기울이는 낮빛처럼 살고 싶습니다. 오늘은 안도현 시인의 <공양>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공양 안도현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 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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