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0 허형만 <겨울들판을 거닐펴>
군산 나포의 작은도서관에 책을 납품하러 올해부터 다녔으니, 사계 중 겨울을 제외한 계절을 모두 만났던 거지요. 어젠 도서관가는 길에서 추수가 끝난 텅 빈 들판과 억새풀들이 나풀대는 모습이 눈길을 잡아서 차를 멈추고 논길따라 조금 걸었답니다.
어느날 논물이 펄펄 솟아나 어린 푸른 모들이 심겨지더니 하늘이 주는 밥을 먹으며 쑥쑥자라나던 수 많은 벼들, 때가 되니 가을들판에 황금빛 숭고한 자세로 물결을 이루던 이삭들은 모두다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공룡알같은 두루마리 짚푸대만 듬성듬성 서서 주인의 표식을 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전같으면 ‘황량하고 쓸쓸하다’라는 느낌이 강할텐데, 이제는 왠지 제 모습 같아보이는 것은 물아일치의 본성이 되살아나는 걸까요.^^
사실 이 작은도서관에 책 삼사십권 주는 행위는 실물경제로는 완전 마이너스랍니다. 책방에 입고되는 공급가와 각 기관들이 나눠갖는 이윤들을 빼고보니 그렇거둔요. 소위 차비도 안나오는 일을 뭐하러 하냐는 삼자의 소리에 수긍했지요. 다른 서점들이 멀어서 가기 싫어하는 두 곳(성산과 나포)이 어쩌다보니, 저한테 배당된 것... 물론 싫다했으면 될 일이지만, 이번 기회에 한달에 한번씩 풍경이나 즐기자 하는 맘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겨울에는 납품도 없지만, 그래도 작은도서관 가는 길의 사계를 사진속에 담아봏아야겠다 싶습니다.
요즘은 중고등부 학생들이 일년을 마무리하는 기말고사이라, 더 정성껏 학습자료를 준비하는데요. 성적이 상위권이었던 어느 학생과 상담하면서, 부모에게도 말 못하는 그 학생의 심리를 미리 알고 다독여주며, ‘그럴수 있지. 어떻게 매일 착하고 공부잘하는 모습만 보일수 있니, 잠시 쉬어가면 더 크게 도약하는 거야’라고 하니까 가벼운 미소로 얼굴이 맑아짐을 느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소위 사춘기를 겪는 학생이지요. 그것도 속으로만 품고 있는 감정의 울분!!
공부와 성적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마음을 달래주는 일. 학생의 편이 되어 주는 일인 것 같아서, 올때마다 따뜻하게 간식이라도 준비하고, 친구들과 웃음거리 시간도 주고 해야겠습니다. 누군가 힘이 들 때, 텅 빈 겨울들판을 한번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속이 시원스럽게 펑 하고 뚫린 것 같은 느낌, 아마도 저만 느끼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허형만시인의 <겨울들판을 거닐며>입니다. 봄날의산책 모니카
겨울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