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스텔라>
먼지바람이 이는 황폐한 지구는 이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빠 쿠퍼는 지구인을 이주시킬 수 있는 다른 행성을 찾아 나서야 하고, 울면서 아빠를 붙잡는 열 살의 머피.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지구는 오랜 가뭄으로 키울 수 있는 마지막 작물이 된 옥수수만이 멀리 펼쳐져 있다. 머피는 자신을 지구에 남겨 두고 우주로 떠난 아빠를 원망하지만 어느덧 자신도 우주 과학자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우주를 비행하던 아버지와 지구에 있던 딸이 다시 만난다. 딸은 늙어 임종을 맞고, 오십대로 보이는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있다. 딸의 나이가 아버지보다 많은 것이다. 그들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던 것일까.
시간(time)은 사전적으로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동안)나 어느 한 지점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운동이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이든 시곗바늘의 움직이든 운동을 통해 시간을 인식했다. 갈릴레오는 우주의 법칙처럼 정확한 움직임 속에서 가장 기본으로 측정 가능한 양을 뜻한다고 했다.
뉴턴 이래로 우리는 시간을 물질세계에서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준으로 정의하였고, 시점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었다. 우주가 공통된 지금을 공유하기 때문에 모든 장소의 관찰자들이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해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살아가고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지구만이 아니라 우주 공간까지 확장한 통일된 시간관을 도입하였다. 이것이 상대성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이 관찰자의 운동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으며, 시간은 방향성이 없어서 과거와 미래로 구분할 수 없다.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을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 가에 따라 너의 지금이 나의 지금과 다르며, 너의 그때가 나의 그때가 아니다. 결코 같은 공통의 현재를 공유할 수 없다. 시간이란 주제는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현대 물리학에 골몰할 즈음 폴 데이비스의 《시간의 패러독스》를 읽었다.
폴 데이비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2000년에 갓 태어난 쌍둥이 앤과 베티가 있다. 앤은 지구에 살고 있고 베티는 2000년에 로켓을 타고 거의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우주를 비행하다가 2020년에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고 가정해 보자. 앤은 쌍둥이 베티가 없이 지구에서 살며 스무 살이 되었다. 베티는 시속 24만 Km의 속도로 우주를 여행했다면 아인슈타인 공식에 따른 시간 워프 인수(시간이 느려지는 인수)를 대입했을 때 그 여행은 12년밖에 걸리지 않는다. 베티는 12살이 되어 지구로 돌아온다. 두 사건 사이에 어떤 고정된 시간 차이, 어떤 실제적인 지속시간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오직 상대적인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다. 지구에서의 앤과 우주를 여행했던 베티의 시간이 있으며, 앤과 베티의 시간은 같지 않았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중년의 아버지와 노년의 딸이 만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버지 쿠퍼는 아들과 딸을 살리기 위해 우주로 향했고, 그동안 NASA에서는 지구를 대신할 새 터전을 찾기 위해 12개의 행성에 사람을 보냈는데 세 군데서 신호가 오고 있었다. 누군가 우리보다 앞선 그들이 우리를 위해 웜홀을 만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차원이 다른 공간에 있는 아버지와 딸. 아버지가 떠나면서 준 시계를 매개로 교신하여 우주의 비밀을 푼다. 그 결과 토성 궤도에 우주정류장을 만들어 지구의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2년의 동면 끝에 아버지를 만나러 쿠퍼 정류장에 온 머피. 지구의 나이로 124세이지만 50대로 보이는 아버지. 침대에 누워있는 주름진 딸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머피는 아빠가 돌아온다는 약속을 꼭 지킬 줄 알았다고 하고, 이제는 딸 곁에 있겠다는 아빠. 머피는 딸의 임종을 지켜보게 하는 건 자식의 도리가 아니니 여긴 자기 자식들에게 맡기고 아빠는 다른 행성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동료 우주비행사에게 가라고 말한다.
그들은 시간이라는 두려운 존재를 이미 초월하였다. 우주정류장에서 다시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맑은 눈, 자신감에 찬 입매와 젊음이 느껴지는 사진 속의 삼십 대. 그 아버지가 사진 속에서 걸어 나와서 육십 대의 나와 마주한다면 우리는 눈물을 흘릴까. 삼십 년의 세월(time)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면서 아버지와 딸이 손을 잡을 수 있기까지 시간(time)은 얼마나 걸릴까.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시간에는 침묵이 스며들어 있다. 침묵하면서 하루는 다른 하루를 향해서 나아가고 마치 어느 신이 자신의 정적 속에서 꺼내놓은 것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또 다른 하루가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과학보다 인문학인 피카르트 사유 속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그리고 흐르지 않는 시간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