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위해의 원칙

- 14장 자유

by 북다이제스터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freedom)의 개념은 1860년대부터 1890년대에 걸쳐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존 스튜어트 밀입니다. 그는 『자유론』(1859)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토대가 된 ‘타인 위해의 원칙’(human to others principle)을 제시했습니다.


밀은 독재 국가가 자유(liberty)를 억압하는 문제에는 이미 익숙했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민주사회에서 다수가 개인이나 소수의 자유(freedom)를 침해하는 상황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행위가 타인에게 해를 끼칠 경우에만, 다수가 그 행위에 간섭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유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했습니다.


이 원칙에 따르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다수는 소수의 재산이나 권리를 침해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합니다. 하지만 ‘타인 위해의 원칙’에 따르면, 다수의 결정이라도 소수의 권리를 함부로 제한할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은 소수자 보호의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밀의 주장은 자본가의 권리를 옹호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가진 자는 소수이고, 못 가진 자는 다수입니다.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리에 따르면, 빈곤층 다수가 부유층 소수를 억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밀의 원칙은 소수를 보호하는 방어막이 됩니다. 타인에게 실질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소수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 원칙은 다수가 소수인 대자본가의 재산 상속이나 시장 독점 같은 문제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동시에 ‘다수의 횡포를 막는 법’은 변화를 열망하는 다수의 의지를 억누르고, 현상 유지를 바라는 소수의 뜻을 관철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후 19세기 들어 자유의 개념은 미국 북부의 임금노동자 문제와 맞물려 다시 쟁점화 되었습니다. 노예제를 유지하던 남부는 임금노동자가 필요하지 않았기에, 북부 사회에 만연한 임금노동이 ‘시민적·공민적 자유’(liberty)에 어긋난다고 비판했습니다. 북부의 임금노동자는 유럽의 무산계급인 프롤레타리아처럼 정치적인 독립성이 부족해, 자유(liberty) 시민으로서 자율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고 본 것입니다.


반면 공업화로 임금노동자가 필요했던 북부는 이러한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북부는 시민적·공민적 자유(liberty)보다 자율적 자유(freedom)를 중시했습니다. 남부 노예제가 비도덕적이라는 점은 비판했지만, 노예가 정치·경제적인 독립성[liberty]을 결여했다는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남부 노예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노동에 묶여 있다는 점, 즉 자유(freedom)의 부재만을 문제 삼았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북부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와 시민적·공민적 자유(liberty)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자율적 자유(freedom)의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임금노동이 도덕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을 길러내지 못한다는 현실을 외면한 채,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계약을 자율적인 선택으로 간주하며 이를 자유(freedom)로 정당화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북부 자유주의는 1870년대 신고전파 경제학으로, 1970년대 말에는 ‘신자유주의’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유의 정치적인 차원[liberty]은 가려지고, 경제 활동의 자유[freedom]만 강조되었습니다. 자유는 본래 존중받을 가치이며, 자유주의자라는 이름 또한 자랑스러워 할 만합니다. 하지만 좋은 외투가 대개 그렇듯, 오늘날 자유나 자유주의, 신자유주라는 용어는 보여주는 것보다 감추는 게 더 많아졌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핵심 규범은 ‘파레토 최적’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일부의 여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부유한 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점에서 파레토 최적은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밀의 원칙과 닮아 있습니다.


우선 파레토 최적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럼 이 이론은 부자들의 부 축적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됩니다. 불평등한 결과 자체는 문제 삼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해를 끼쳤는지만을 문제 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소득 불균형은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더욱이 파레토 최적은 외부효과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부효과 없이 누군가의 여건이 개선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라는 전제 자체가 현실적으로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그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일 수도 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일 수도 있습니다. A와 B 사이에서 A의 손해 없이 B가 이익을 얻더라도, 제삼자인 C가 손해를 본다면 – 환경오염 같은 사례 – 이는 결코 ‘해 없는 개선’이 아닙니다.


끝으로 파레토 최적이 실제로 가능한지도 의문입니다. 권력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회에서, 누구도 가난해지지 않으면서 누군가만 부유해지는 변화가 과연 가능할까요? 그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상황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결국 파레토 최적은 적용 범위가 극히 제한된, 이상적인 가정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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