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장 자유
자유(freedom)는 인간에게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와 ‘개인주의’라는 성향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특히 개인이 외부 영향 없이 자율적으로 선택한다는 ‘주의주의’는 자유주의 윤리와 정치의 기본 토대가 되어 왔습니다.
정치철학자 페트릭 데닌(1964~ )은 칸트가 주의주의, 곧 자율성 개념을 철학적으로 고양한 인물임에 주목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의 근본 문제는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가 개인 자율성을 전제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다. 자유의 문제는 칸트 철학이 악용된 데 있지 않다. 애초에 칸트가 개인의 자율성을 고양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칸트는 자유주의 윤리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윤리학의 기초는 그가 제시한 원자론적인 인간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칸트는 보통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꼽힙니다. 기독교와 근대 과학의 영향을 받은 그는, 신과 이성이 서로 모순되지 않도록 조화시키려 했습니다. 그가 기독교로부터 물려받은 핵심 유산은, 인간의 영혼이 신으로부터 자유를 부여받았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자유 문제에 깊이 몰두했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점이 인간을 자연의 다른 존재와 구별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유란 무엇인가’, 그리고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상황에서 이성에 따라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자유롭게’ 만들고 또한 ‘자유롭게’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을 자율적인 주체, 곧 주의주의 존재로 볼 수 있습니다. 자유롭지도 않은데, ‘마땅히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건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난제와 씨름하던 칸트는 결국 미궁에 빠졌습니다. 그 자신도 수수께끼라고 인정했듯, 도덕의 전제로서 자유는 꼭 필요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로 설명할 수도,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도, 이성적으로 통찰할 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도덕법칙이 개인의 자율에 근거하려면, 인간의 이성은 감정이나 외부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 한계를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외부 요인에 좌우된다면, 실제로 세상에 도덕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 자기가 자유롭다고 스스로를 기만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실상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외부 요인에는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감정(충동, 열정 등)이나 무의식까지 포함됩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어쩔 수 없이 휘둘리고, 무력해지고, 때로 압도당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이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의사들은 처방이 오직 환자의 병에만 근거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뇌 영상 촬영 실험은 이러한 믿음이 자기기만에 불과함을 보여줍니다. 실험 결과, 의사들의 처방은 제약회사가 제공한 선물에 영향을 받았으며, 제약회사의 판촉 활동이 의사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의사들은 자신이 외부 영향에서 자유롭다고 여기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유를 증명하지 못한 채, 결국 이를 ‘이성의 선험적인 사실’ 즉,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본래의 것’으로 가정하고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자유는 그의 윤리학 체계에서 무조건 필요한 전제였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도덕 판단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려 했지만, 끝내 알 수 없어 자신의 아이에게 “그냥 그렇기 때문이야!”라고 윽박지르는 부모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가령 아이가 “고양이를 불 위에 놓으면 왜 안 돼요?”라고 묻자, 엄마는 “그건 불필요한 고통을 주니까!”라고 답합니다. 아이가 다시 “불필요한 고통이 왜 나쁜 거죠?”라고 되묻자, 엄마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게 나쁘다는 걸 알지!”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또 “그런 사람은 왜 그게 나쁘다고 아는데요?”라고 물으면, 결국 엄마는 “그냥 그렇기 때문이야!”라고 답하는 식입니다.
칸트의 주장은 실질적인 증거가 없는 무모한 논증입니다. 선험적인 사실과 같은 ‘원인 없는 원인’을 상정하려는 시도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가사의한 일을 더 불가사의하게 만들 뿐입니다. 칸트의 추종자들조차 이를 인정했습니다. “누구나 칸트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칸트를 칭송한 쇼펜하우어조차, ‘자유는 미스터리다’를 자신의 비문으로 삼았습니다.
니체는 칸트가 도덕을 증명하려 한 야망을 ‘영혼의 은밀한 농담’이라며 냉소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도덕은 한 번도 공리나 전제를 바탕으로 증명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만으로는 경합하는 가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이성적인 사고는 ‘전제’를 필요로 하며, 전제 없이 이성은 우리 질문에 답을 줄 수 없습니다.
논리학의 창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도덕]와 이론적 인식[논리]을 구분했습니다. 실천적 지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답하는 걸 목표로 삼습니다. 반면 이론적 인식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답합니다. 논리는 오류를 피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도덕적인 질문에는 답하지 못합니다. 논리적인 계산으로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도덕 문제입니다. 특히 감정 없는 논리[이성]는 이론상으로 구분되지만, 실제 삶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칸트는 동정심 같은 감정을 배제하고, 순수한 의지만으로 도덕의 근거를 삼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시도입니다. 감정 없는 의지는 내용 없는 형식에 불과합니다. 라캉은 칸트가 윤리학에서 감정을 분리하려 한 시도를 “기괴하다”고 묘사했습니다.
계몽주의와 칸트의 영향으로 우리는 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감정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깁니다. 가령 권력이 있는 남성에게는 ‘감정 없는 태도’가 기대됩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진정한 남성성과 리더십의 기준은 감정을 억제하고 냉철함을 유지하는 능력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높은 지위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태도를 지향합니다.
그 결과 감정에 거리를 두는 태도가 미덕이 되었고,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감정은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무표정한 남성이 감정적인 여성보다 더 합리적이고 신뢰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여성들 역시 남성 중심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감정 없는 태도’를 열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윤리적인 판단에서 감정은 중요합니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사이코패스입니다.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냉혈한 사이코패스의 문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결여에서 있습니다. 그들은 감정의 동요 없이 항상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반응합니다. 사이코패스의 뇌는 ‘증오’나 ‘사랑’ 같은 단어를 일반인과 다른 영역에서 처리합니다. 정서를 담당하는 영역이 아닌 언어와 분석을 담당하는 이성 영역에서 이를 처리합니다. 감정이 판단에 개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칸트는 어쩌면 우리가 모두 사이코패스처럼 되길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칸트처럼 합리적인 판단이 항상 옳다고 낙관해선 안 됩니다. 감정은 종종 이성보다 더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판단 과정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히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전적으로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가령 어느 전문가는 미국 대통령이 가장 아끼는 사람의 가슴에 핵미사일 발사 버튼을 심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버튼을 누르려면 그 사람의 가슴을 절개해야 해야 하므로, 감정이 결정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로봇처럼 감정 없이 행동한다고 해서 세상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칸트와 달리 데이비드 흄은 도덕 판단의 근원을 감정에서 찾았습니다. 흄에 따르면 우리는 논리적인 추론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대신 좋고 싫음을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도덕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정서적인 반응입니다. 도덕은 판단되기보다 느껴집니다.
예컨대 ‘살인은 나쁘다’라는 명제에서 ‘살인’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나쁘다’는 평가는 주관적인 감정입니다. 이 둘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연결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수십만 명을 죽인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드로스가 모두에게 동일한 ‘나쁘다’는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흄은 “계획된 살인 같은 악행을 모든 측면에서 검토해 보라”고 권유하며, “그 안에서 악이라 부를 만한 사실을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장담했습니다.
“악이라는 사실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대신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살인에 대한 반감이라는 감정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은 존재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대상이다. 악은 대상에 있지 않고, 당신의 내면에 있다.”
이 점은 설득의 현실에서도 드러납니다. 내가 누군가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때, 상대방이 마음을 바꾸어 내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자주 있었나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논거는 이미 주관적인 감정으로 판단된 뒤, 나중에 이성적으로 꾸며낸 합리화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논리에 설득되지 않습니다. 설득하려면 이해관계나 감정에 호소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을 이성적으로 듣기보다 정서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이성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지만, 사실 무의식의 충동에 이끌립니다. 이성은 겉으로 드러난 표현 형식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그것에 지나치게 집중합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욕망이나 충동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마다 당황합니다. 우리는 선언하고 맹세하며 결심하지만, 이를 실천할 의지가 부족하다는 사실에 매번 놀랍니다. 이는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성이 감정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흄은 “인간이 옳고 그름을 빨강과 파랑을 인식하듯 객관적으로 본다는 환상에서 벗어난다면, 세상의 슬픔과 혼란이 크게 줄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칸트는 왜 자유를 끝내 논증하지 못하면서도, 이를 ‘선험’의 영역으로 넘겨버릴 정도로 자유에 집착했을까요? 그의 생활 습관이 무의식에 영향을 준 건 아닐까요? 그는 규칙적인 산책으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부유한 상인들과 매일 3~5시간씩 함께 식사했습니다. 그가 ‘자유’(freedom)를 핵심 가치로 삼는 상인들과 교류한 건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오늘날 자유를 핵심 가치로 삼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에, 칸트가 가장 유명한 철학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 역시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유는 설명되기보다 신성화되었고, 비판되기보다 전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끊임없이 자유를 말하지만, 정작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는 점점 더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철학>(1894)
오스트리아 빈 대학은 클림트에게 이성을 강조한 ‘철학’ 같은 명확한 작품을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벌거벗은 사람들이 서로 모호하게 뒤엉겨 둥둥 떠다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러 형식이 서로 충돌하고 녹아들며, 마치 만화경처럼 뒤섞이고, 그 주변은 텅 빈 공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대 어느 비평가는 클림트의 직업학교 출신 이력을 들추며 “철학을 이해하기엔 배움이 부족하다”고 조롱했습니다.
클림트는 삶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기에, 이성주의가 과연 성공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집니다. 과연 이성이 정말 성공으로 가는 길일까요? 감정이 훨씬 강력한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