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장 자유
주의주의를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제시한 철학자는 국가권력을 옹호한 토머스 홉스(1588~1779)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입니다. 취약한 환경에서 삶이 “추하고 잔인하고 짧다”고 판단한 자율적인 인간은, 합리적인 자기 이익에 따라 보호와 안전을 국가에 맡기고 대부분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이 같은 국가 권력의 정당성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사회계약에 근거합니다.
하지만 이 전제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율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믿지만, 실제 선택은 사회화나 훈육이 내면화된 잘못된 결정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경제학 교육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정통’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이 인간을 단지 이기적인 행위자로 기술할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경제학 자체가 학생들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미쳐 그들이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1945~ )의 연구에 따르면, 경제학과 학생들은 다른 전공 학생들보다 “경제학에서 반복적으로 주입되는 자기 이익 모델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더 이기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이기주의는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길러집니다.
이기주의는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꼼수와 잔머리, 심지어 거짓말로까지 확장됩니다. 프랭크의 실험에 따르면, 경제학과 학생들은 공동 구매 상황에서 친구를 희생시키고 업자로부터 상납받을 가능성이 다른 전공 학생들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는 “경제학을 배울수록 이기적인 행동이 일상 전반에 스며들며, 이기주의가 대체로 적절하고 심지어 바람직하다는 믿음이 강화되고, 그 믿음은 다시 이기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자유주의가 확산될수록 이러한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는 더욱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개인이며, 개인을 보호하고 자율과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습니다. 개인주의는 홀로 선 개인을 낭만화하며, 타인의 요구나 공동의 생존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게 합니다. 또한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유럽과 북미에서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노동자는 지배 엘리트에 맞서 싸웠고, 흑인은 인종차별에 저항했으며, 여성은 가부장제에 도전했습니다. 학생들은 권위주의 교육에 반발했고, 복지 제도 확립을 위한 투쟁도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한 지배 세력은 기존 지배 질서를 정당화할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습니다. 단순한 보수주의를 넘어, 사회 연대와 상호의존성을 부정하는 신우익 이념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우익 이념의 바탕에는 개인주의 철학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개인주의는 단순한 인간관을 넘어,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강력한 정치적인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개인만을 지나치게 중시한 대가로 우리는 중요한 걸 잃고 있습니다. 바로 ‘공동의 목표를 공유해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개인주의는 우리를 고립시키고 경쟁을 부추겨 분열을 일으키며,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자각을 약화시킵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건 누구에게나 이롭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로운 일이 다른 이에게는 무의미하거나 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여러 목표 중 하나를 선택할 뿐,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목표를 상상하지 못하며,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그 배경에는 개인주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복잡한 전체가 아니라 개별 부분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고립된 개인으로 인식하도록 배워 왔고, 존재들 사이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잊었습니다. 개인주의가 확산될수록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많은 개인 문제는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으며, 종종 공적인 문제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빈곤하고 불안한 이유를 구조적인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탐욕스러운 기업가나 타락하고 무능한 정치인 탓으로 돌립니다. 빈곤 역시 가난한 개인의 습관이나 태도, 능력 문제로 해석됩니다.
개인주의 관점에서는 세상을 개선하는 해법도 비슷합니다. 일은 그 일에 적합한 개인에게 맡기면 됩니다. 반대로 개선될 의지가 없거나 여지가 없는 사람은 가두거나 쫓아버립니다. 개인 정신치료도 점점 더 권장됩니다. 공공 문제를 개인의 ‘정신병리’ 현상으로 설명하는 요즘 경향은 사회의 중요 문제를 회피하려는 시도입니다. 빈곤 같은 사회 문제조차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씩 빈곤 상태에서 구제해 내거나, 개인 인성을 바꾸려고 시도합니다. 테러를 막기 위해서도 모든 개인을 한 명씩 조사해 위험인물을 찾아내려 합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일단 개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는 순간 사회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고 방치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개인 차원의 대응은 전형적인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입니다. 개인에게 최선인 선택이 사회 전체에는 최선이 아닐 수 있으며, 그 부작용은 결국 개인에게 되돌아옵니다. 개인주의는 세상을 오로지 개인의 내면 문제로만 설명하려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을 사회나 공동체와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오인하게 됩니다.
계몽주의 이후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프랑스 실존주의 운동을 거치며, 우리는 사회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투쟁해 왔습니다. 이제 서구 사회는 그 목표에 거의 도달해, 사람들은 역사상 유례없는 자유(freedom)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상가가 지적했듯, 자유는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자유는 바람직해 보입니다. 하지만 의지할 공동체 없는 개인주의 환경 속에서 겪는 실패와 좌절은 조금씩 쌓여 우울증으로 이어집니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1942~ )은 현대 사회에서 우울증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 개인주의의 확산을 지목했습니다. 공동체 유대가 약해질수록 실패나 좌절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기 쉽고, 이는 무력감과 자기 비난으로 이어집니다.
“단극성 우울증(조증이 동반되지 않은 우울증)은 ‘나’의 좌절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모든 걸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도록 배웠다. 과거 공동체 중심 문화는 때로 답답했지만, 개인의 실패를 더 큰 맥락 속에서 사소한 일로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과 서유럽에서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거의 유일한 렌즈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우리는 자신의 실패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그만큼 우울증에 더 쉽게 빠지게 되었다.”
우울증뿐 아니라 자살 역시 사회의 ‘통합’ 수준, 곧 연대력(solidarity)과 깊이 연관됩니다. 과도한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와도 끈끈한 유대를 맺기 어렵고,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만의 문제로 좁혀집니다. 사회는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전락하며, 그 결과 고립과 절망이 심화됩니다.
불교는 자아를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체의 일부이며, 고통 역시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부처는 자아와 욕망을 전체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개인적인 좌절이나 패배, 고통이 더 이상 깊은 슬픔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더 이상 ‘나만의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