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장 자유
다른 자유 개념인 ‘freedom’은 개신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인은 교황이나 사제를 거치지 않고, 신과 직접 대면하는 종교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인간을 신 앞에 거칠게 내몰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유는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개인이 직접 신과 마주하면서 종교적인 엄격함과 중압감에 시달렸고, 정신병에 걸린 이들도 속출했습니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1905~80)가 지적했듯,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을 받은 셈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은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다정하다’며 사람들을 달래야 했습니다. 본래 신과 천사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구약성경 <토빗기>에서 토빗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 라파엘을 보고 공포에 질려 기절합니다. 천사는 신을 보좌하는 호위군이자, 신의 명령을 인간에게 전하는 막중한 사명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신이나 천사를 본래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르네상스 시기를 지나며 무서운 신과 천사는 점차 친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바뀌었습니다. 심판의 신은 이제 다정한 천사를 보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개신교는 단순한 예배 의식보다 진실한 신앙과 개인의 양심을 중시했습니다. 이전 가톨릭교회는 의례와 도덕적인 행위에 따라 죄가 용서된다고 가르쳤고, 고해성사처럼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며 개인 차이를 인정했습니다. 죄 때문에 개인이 중압감이나 굴욕을 느끼지 않도록, 죄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할 인간 약점으로 다루었습니다. 가톨릭은 인간 본성을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보고, 결국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의례나 선행으로 죄가 용서되지 않습니다. 죄는 오직 믿음에 따라 용서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행동이 순수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는지 끊임없이 내면을 살펴야 했습니다. 결국 외적인 권위 대신, 자유로운 양심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자유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그 자체로 하나의 권리로 존중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구현된 자유(freedom)입니다. 혁명 과정 시 모순과 충돌이 워낙 컸던 탓에 프랑스인들은 자유를 자연적 자유, 즉 구속받지 않고 자신 의지대로 행동할 권리로 이해했습니다. 혁명 이전 사회의 불합리한 억압과 제한에서 벗어나, 이제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긴 것입니다.
자유(freedom)가 이처럼 중요한 가치로 떠오른 건 프랑스혁명 이후입니다. 1801년 발표된 어느 논문은 ‘자유’라는 가치의 탄생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현재 개혁가들이 널리 퍼뜨리고 신성시하며 불가사의한 의미로 각인시킨 ‘자유’나 ‘휴먼’과 같은 표현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떠올리지 않았을 단어다.”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자유’(freedom)는 19세기 정치의 핵심 개념이 되었고, 앙시앙 레짐의 몰락이 가져온 변화를 강조하며 개인 권리를 옹호하는 실천 강령이 되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는 전반적인 물가 상승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업이나 금융 자본가들은 투자금을 확보하고, 경제 성장과 함께 그들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이들은 루이 14세 이래 이어진 절대왕권(“짐이 곧 국가다” L’état c’est moi)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권리를 원했습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산업자본가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세운 사회혁명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세 단계로 전개되었습니다. 1791년 첫 단계가 끝나자, 정부는 부유층이 권력을 쥔 제한된 군주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모든 시민에게 공민권이 있었지만, 일정 세금을 낸 부자만 투표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인구 2천6백만 명 중 단 0.2퍼센트만 선거 대의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선출된 대의원 745명은 모두 재산으로 부를 쌓은 부유한 남성이었습니다.
첫 단계 혁명 후 새롭게 제정된 헌법은 주로 재산 있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대변했습니다. 기업의 자유로운 성장을 위해 길드와 같은 동업 조합은 철폐되었습니다. 길드가 무제한 이윤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존 귀족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중앙집권을 폐지하고 지방정부를 전면 개편했습니다. 부유한 자본가들은 지방 분권화로 구체제에서 벗어나려 했으며, 이는 자본가들의 자유주의 신념을 보여주는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하층민은 혁명으로 얻은 게 없음을 깨닫고 환멸을 느꼈습니다. 정부 통제를 벗어난 자유주의 기업 탓에 물가가 전반적으로 상승했습니다. 하층민은 정부에 빵값을 혁명 이전 수준으로 낮추고, 심해지는 인플레이션을 조절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1792년 제2단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자코뱅파 구국위원회가 정부를 장악했습니다. 자코뱅파는 하층민의 이익을 대변하며, 프랑스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는 걸 막고자 했습니다. 생활필수품에 가격 상한을 두고, 토지를 무상 분배해 농민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또한 고대 아테네 이후 처음으로 모든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하며 정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1796년 자본가들이 다시 자코뱅파로부터 권력을 되찾았습니다. 제3단계 혁명에서 주도권을 잡은 부유한 자본가들은 새 헌법을 채택했으나, 농민과 도시빈민의 뜻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새 헌법은 사실상 부유한 계급의 승리를 공인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선거권은 재산 조건에 따라 제한되었습니다. 농장을 소유하거나 연간 수입이 최소 100일 치 임금에 해당해야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정부 권력은 다시 부유층에 집중되었습니다.
부유한 자본가들은 자코뱅파에 동조한 사회주의 급진파를 해산시키고, 자신들이 생각한 프랑스혁명의 근본정신인 자유(freedom)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재주만 있으면 어떤 경력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는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이때 확립되었습니다. 그 결과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나 보상이 주어지고, 그로 인한 불평등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권력을 쥔 자유주의 자본가들은 제2단계 혁명에서 대중이 개혁을 주도한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대중은 교육받지 못한 비합리적인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프랑스혁명은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피지배 계급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유한 자본가는 투쟁으로 얻은 수많은 자유 가운데 단 하나의 자유, 즉 상거래의 자유만 앞세웠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칸트는 부유한 자본가들이 공포한 새 헌법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투표하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정부 형태가 마침내 실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개인이 내면의 결단에 따라 ‘자유롭게’ 투표하도록 권장받았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해방된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칸트가 올바르게 이해했는지는 별개로, 그가 프랑스혁명을 위대한 해방으로 본 이유는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영혼이 인정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견해는 프랑스혁명을 ‘대중’이나 ‘일반 시민’의 혁명으로 보는 오늘날 흔한 오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장 앙투안 바토 <키테라 섬으로의 출항>(1717)
프랑스 로코코 문화를 이끈 주체는 귀족 문화를 동경한 상층 부르주아였습니다. 이들은 혈통 귀족과 달리 부를 기반으로 관직을 얻은 신흥 귀족으로, 화가 바토의 주요 고객층이었습니다.
그의 그림 속 우아한 인물들 역시 이 부르주아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부와 사회적인 지위는 높았지만, 정치 참여가 제한된 이들의 불만은 결국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가 계급이 정치적인 자유를 경제적인 자유로 변질시켰다고 보았습니다. 부유한 지배층은 사회와 무관하게 자신의 재산을 마음대로 누릴 권리, 즉 경제적인 자유(freedom)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평등을 요구한 가난한 다수는 소수 부유층의 재산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었고, 이를 막고자 자유의 중요성을 헌법에 명시했습니다. 그 결과 자유는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감추는 관념적인 표현이 되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유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제약받지 않는 지배자들이 자유롭지 못한 시민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자본가 계급이 나폴레옹 체제에 만족한 사실은, 당시 자유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자유는 단지 자본가들이 경제적인 수단을 소유하고 향유할 권리에 한정되었습니다. 정치철학자 콩도르세는 이에 환멸을 느끼며 “자유란 탐욕에 사로잡힌 자본가들에게 안전한 자금 운용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에 불과해질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결국 혁명은 돈 벌 자유와 자유 그 자체를 혼동하게 만들었고, 그 혼동은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1950년대 중국 공산당 주석 저우언라이(주은래, 1898~1976)는 1789년 프랑스혁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아직 평가하기 너무 이르다”고 답했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촉발된 변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어 판단 내리기에 시기상조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 과정이 진행 중인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자본가가 자신의 부를 지킬 정당성을 처음 마련해 준 철학자는 존 로크였습니다. 그는 사유재산제를 정당화하고자 시민의 경제적인 자유(freedom)를 논리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의 요지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시민’은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로크가 염두에 둔 ‘시민’은 ‘일반 대중’이나 ‘모든 시민’이 아니라, 한정된 집단이었습니다.
로크가 사유재산제를 정당화한 근거는 천부인권(天賦人權)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지니며, 그 신체로 생산한 재산 역시 자신의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는 나아가 “인간이 스스로 정부 지배를 받아들이는 이유도 이렇게 모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였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1860년대 에도 시대에 프랑스혁명과 같은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계급 혁명의 필요조건을 상당 부분 갖추고 있었습니다. 정교한 금융 시스템이나 낮은 문맹률, 발달한 대도시, 그리고 자본가 계급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상인층의 존재는 모두 주목할 만한 요소였습니다. 상인들은 산업 경제에 필요한 자본을 축적하고 운용할 능력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상인들이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재산권을 신성하고 불가침한 권리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막부 권력에 도전할 이론적인 정당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로크 사상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정부는 필연적으로 필요해진다. 재산이 없다면 정부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실제로 정부는 가난한 사람에 맞서 부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말은 소유권이 타고난 권리가 아님을 드러냅니다. 타고난 권리라면 굳이 국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견고해 보이는 소유권 개념은 취약한 논리 위에 세워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유권 보호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개인 재산, 특히 공장과 설비 같은 생산수단을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함으로써 경제 권력을 장악했고, 그 힘은 정치 권력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정부가 소유권을 보호한다는 말은, 경제와 정치를 모두 장악한 자본가 계급을 보호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지점에서 로크의 자유 개념은 분명한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건 공동의 삶이나 공적인 가치로서의 자유(liberty)가 아니라, 개인 재산과 그 보호로서의 자유(freedom)에 기반을 두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는 겉으로는 인간 보편의 자유를 옹호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무산자와 노동자 같은 약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