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약사로 살았던 때가 그립다
고3이 되어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 생각에 '넌 약사가 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꿈이었던 난 아버지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난 약사가 되었다.
대학 4학년 때 다른 친구들이 이쁘게 화장하고 작고 이쁜 핸드백을 들고 다닐 때
난 커다란 가방에 두꺼운 원서들을 담아야 했고 책들과 싸우며 국가고시 준비를 해야 했다.
국가고시에 합격해서 약사가 되었고 대학 종합병원 약국에 취직을 했다.
약사가 되어서 좋았던 일들이 많았다.
아파서 진료하러 다닐 때만 갔었던 대학병원에 내가 직원이 되어 출근을 했었고
대학 병원 약국에서 약을 조제할 때면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 같아서 좋았다.
나는 병원 약국이었기 때문에 의사 처방대로 조제를 했지만
그때는 의약분업이 되기 전이어서 일반약국에서는 처방전이 없어도 약사가 조제를 했다.
'약사님' 하고 불리는 것도 좋았고 약사 가운을 입고 일하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가장 좋은 게 있었다.
내가 약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아버지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나를 바라봐 주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모습은 내 삶의 에너지가 되었다.
그 덕분에 바쁜 업무도 거뜬히 해냈고 한 달에 일주일씩 해야 하는 야간근무도 견딜 수 있었다.
어느 날 약국 접수 데스크에서 대학 신입생 때 만나서 친하게 지냈었던, 다른 대학 한동아리의 리더였던
남사친을 만났는데 뭔가 이상했다. 아주 활발했었고 장난기 많았던 그였었다.
눈빛이 불안해 보였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말없이 의사 처방전을 내밀었고 난 반가움에 'ㅇㅇ 씨' 하며 인사를 했는데 그는 그냥 나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처방전을 확인해 보니 정신의학과에서 내려준 처방이었다.
'그랬구나~ 그는 마음이 아픈 거였구나~'
나는 처음 만난 사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금만 기다리세요'라고 말하고 조제실에 들어갔는데
눈물이 났다. 무슨 일이 있어서 누구보다 밝았던 그가 저렇게 아픈 모습이 되었을까?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아팠다. 한알 한 알 약을 담으며 어서 건강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지금 돌아보면 어쩌면 그때부터 심리에 대한 관심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병원 약국에서의 나의 삶은 과한 업무량으로 피곤하기도 했지만 나름 즐거웠다.
선배 약사 언니들이랑 수다도 떨고 가끔 회식도 하고 약을 받으러 온 병동 간호사들과 눈인사도 하고 그렇게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좋았던 것 같다.
약학대학에 다닐 때 마음속으로 다짐한 게 있다.
처음에 대학 병원 약국에 다니기 시작할 때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일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기가 생기고 나니 야간근무가 부담스러워서 퇴사하게 됐고 복직할 때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서 일하기도 하며 약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친정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아니야~~ 아닐 거야~~ '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날부터 5개월 동안 2주에 한 번씩 친청에 가서 3박 4일 동안 아버지 간병을 도왔다.
우리 3남매가 모여서 의논을 했고 내게 정해진 시간들이었다.
기차를 타고 친정에 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예전처럼 아버지가 기차역에 나오셔서 날 마중해 주실 만큼 건강해지시기를...
하지만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발병 6개월이 채워지기 전에 떠나셨다.
그리고 나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슬픔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고 교회에 가면 아버지의 쾌유만을 위해서 기도에 집중했던 나였기에
아버지가 안 계시는 지금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울기만 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내게 아버지의 자리가 이렇게 컸었는지 몰랐다.
내 주위에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다정하게 나를 챙겨주는 남편이 있었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었다.
여러 곳에서 리더 역할을 하며 뿌듯해하던 내 역할들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내 삶 속에서 아버지가 해주시는 것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이 가시고 나자 나의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겠다며 약사가 됐던 난, 정작 내 마음이 아파지자 어떤 약으로도 나의 아픈 마음을 치료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슬픔의 고통이 너무 커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는지 잘 몰랐다.
어느 날 힘들어하던 내게 한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슬퍼? "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우울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그때 깨달았다.
내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뭔가를 하기 위해서 시작한 게 미술치료였다.
환하게 보이는 내 얼굴과 다르게 그림 속 나는 늘 어두운 표정에 눈을 감고 있었다.
강사는 그림을 내 얼굴 옆에다 붙여서 보여주며 '너무 다르지 않나요? 속마음을 내려놓으세요'라고 말했다.
그때는 그 말이 와닿지 않았고 그냥 얹잖기만했다.
그렇게 나의 심리치료는 시작됐다. 그리고 상담에 대한 마음이 커져갔다.
나의 우울증이 어느 정도 나아졌을 무렵 난 정식으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상담대학원 심리치료학과에 입학했다. 몇십 년 만에 만난 강의실은 나에겐 꿈같은 행복이었다.
내가 관심 있는 공부를 하게 되니까 강의를 듣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대학원에 다니며 거의 날아서 다녔다고 말할 정도로 학교에 가는 길 위에 있는 내 발이 엄청 가벼웠다.
대학교 때 이 정도의 열정이었으면 크게 뭔가 했을 텐데.. 싶었다.
어느 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눈을 반짝거리며 강의에 집중하는 모습이 젊은 학생 같다."라고..
대학원 동기 중에 4번째로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아시는 교수님이라 신기해하신 것 같다.
결국 행복했던 대학원 시간들은 전 과목 좋은 학점으로 마무리를 했고
상담심리사 시험을 보기 위해 또 밤샘 공부를 해야 했다.
대부분 내 나이 정도 되면 상담 공부를 하더라도 시험에 도전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사실을 나중에 면접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딸 또래의 젊은 친구들과 같이 면접을 봤으니까...
시어머님이 '안정된 직업인 약사를 그만두고 상담사가 되겠다고 저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대학원 동기들도 역시 비슷한 생각들이었으니까 어머님 말씀이 이해가 됐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난 상담심리사가 되었다.
몸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약사가 되었던 나는
이제는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상담사로 살아간다.
누군가가 물어 온 직업만족도에 난 100점을 찍었다.
나처럼 마음 아팠던 사람을 치료하고 다시 웃음을 찾아주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 삶을 바꿔주셨어요'라고 말하는 그들의 고백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일에 나를 사용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