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마지막 수업과 메멘토 모리
마지막 수업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슬픔은 없다. 오직 그것을 듣는 사람들만 슬픈 것이다. 그 슬픔의 한가운데 오직 사랑하는 자식들을 생각하는 아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때론 엄하게 때론 나쁜 감정의 도화선이 나를 폭발시킬 때마다 아이들에게 할 소리, 못 할 소리 구분하지 않고 말했던 지난 나의 말과 행동은 나를 끊임없이 반성하도록 했다.
그 감정이란 것이 그 하루의 일상 중에 아주 미미한 부분이었다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평생의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자가 약자에게 저지르는 행동들이 당연시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 어디에선가 울먹이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다.
알퐁스 도데의 당구 편에 나오는 군인들의 모습처럼 춥고 배고프고 더군다나 비가 와서 옷과 신발도 젖었고 피곤한 몸을 병사들과 기대어보지만 여기저기서 적병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상황들이 내 인생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 글의 흔적을 다시 보았다.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시 만났다. 그때의 나는 오늘의 우리가 어떨 것이라는 것을 말했다. 나 역시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를 더 멋진 모습으로 만나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더욱 나빠진 눈과 귀 그리고 정신 더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더 심적으로 더 피폐해진 나의 문장을 쓰고 있다.
행동과 말도 다르고 또 다른 내가 내 속에서 나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무의식의 내가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고 있었다. 그 무의식의 나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자연과 사람들과 내가 사는 모든 공간과 함께 하고 있었다.
의식 속의 나는 무의식 속의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시간과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고 놓아두지 않았다. 나는 나 스스로 자유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운명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내려와 짧지 않은 인생 속에서 부딪친 고뇌와 고통을 이젠 힘들게 짊어지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왜 이렇게 안타까운지 늙어가는 것은 곧 죽음을 준비하라는 신호처럼 들린다.
야위어 가는 몸과 주름진 손과 얼굴들 중에서 유일하게 늙지 않는 것은 스승님의 정신뿐이었다. 지금이라도 스승님은 천리마를 타고 그 말을 싣고 전 세계를 달릴 것처럼 큰 울림을 준다. 마치 물음표를 길게 늘어뜨린 것처럼 생은 그 긴 세월 동안 그 물음을 놓치지 않고 달렸더니 느낌표가 된 것처럼......
P.S The headfake of my book was not you,
but our sons.
대학시절 메멘토 모리라는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십 년도 더 된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인간의 사유, 공허, 죽음, 종교라는 단어들이 눈에 보였다. 인간이 죽음에 가까워지면 항상 종교를 찾는다. 종교는 죽을 때가 가까워진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지만 생각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처음이자 마지막이기에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인생과 삶을 되돌아본다.
그 삶의 여정에서 신은 항상 물음표였고 우리가 사는 공간과 존재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내 존재가 없다면 정말 있기라도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허구라는 상상을 해본다. 자고 일어나면 나는 어느 깊은 산속의 작은 꽃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땅 속 깊은 곳에서 "지구라는 곳은 아주 어두운 곳이구나"라며 땅을 파고 있는 지렁이가 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존재들이 어느 것 하나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이 없었다. 하물며 작은 미물도 이 세상에 온 이유가 있었다. 왜 그런 존재들이 우리 지구를 구성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존재는 항상 그 존재들과 어울려 시간이라는 축에서 생과 사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었다. 그 어느 것 하나 생과 사를 빗겨 날 수 없었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먼 과거의 사람들이나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에게 이렇게 흔적을 남겨주고 있다는 것만 봐도 삶은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선택이었다면 그 신은 또 누가 만들었고 태양처럼 꺼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절대자라면 어디서 무엇을 하길래 하느님이나 부처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걸까. 오늘도 죽음 앞에서 슬퍼하며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고 죽어가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죽은 사람은 죽고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처럼 살아가도록 만든 신의 뜻은 무엇인가?
신은 인간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절대적인 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종교는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하느님을 믿고 부처님을 믿으라고 성경을 보내주고 불경을 보내주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가족의 영향이 크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 있으면 기독교인이 되고 불교를 믿는 불자가 있으면 부처가 된다. 이어령 교수님도 이민아 목사가 아니었다면 평생 아무런 종교 없이 사셨겠지만 결국에는 그 종교로 영성을 얻게 되셨다.
우리 아버지도 우리 어머니 때문에 부처가 되었던 것처럼 험난한 인생의 고비를 겪으시면서도 굴하지 않고 죽는 그날까지 우리들에게 어떤 믿음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종교를 권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란 나에게 종교는 기피 대상 일호이다. 나는 아무런 종교를 믿지 않지만 예수님을 좋아하고 부처님을 좋아한다.
종교의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어차피 생은 나를 정신적으로 지지해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인간으로서 설 수 있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많이 느낀다. 종교가 없다면 인간은 인간답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동물의 본능대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종교가 아름다운 것은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 어떤 인간의 행동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죄를 지은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행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신은 그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
오늘은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지만 이십 년이 또 지나고 나이가 들어 정말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면 나의 글은 또 달라져 있겠지만 오늘의 나는 이런 생각과 글들로 나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이 쓴 글과 생각들이 나의 문장으로 나온다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죽음을 앞에 두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부질없는 일에 목숨을 건다. 그냥 잘 살아가면 그만인데 서로가 그렇게 욕심을 부린다. 그래 봐야 백 년을 못 살고 죽는데 그 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문명들이 반복하며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새로 태어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처음이기에 똑같은 인간의 잘못을 반복하며 또 다른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 역사 속에 신은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만 있다. 언제 갑자기 커다란 행성이 지구와 충돌하게 되면 그때는 모든 인류가 멸망하고 또다시 공룡이 지구를 지배하는 시대가 올 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억만 겁의 시간이 흘러왔다는 것만으로도 생은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인간의 능력은 믿음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