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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et Nov 07. 2019

내가 글을 쓰는 이유

Que ma vie doit être légend c'est-à-dire lisible et sa lecture donner naissance à quelque émotion nouvelle que je nomme poésie. Je ne rien, q'un prétexte.
(나의 삶은 읽혀질 수 있는 하나의 전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읽혀지면 시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정서가 탄생할 것이다.)
   

 기억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하는 저 먼 시간에서부터 s는 항상 말이 많은 아이였다고 한다. 그 시간의 s를 키운 것은 삼촌의 낡고 소진된 빈 방이었다. 방 안 가득 들어찬 주인의 흔적들이 돌아오지 않을 주인의 부재를 선명하게 보여주던 곳. 부재가 스멀스멀 벽지를, 천장을, 장판을 서서히 갉아먹어 들어가던 외로운 공간. 그 시절 나에게 글자들은 헛헛한 시간의 허기를 채워주는 군것질거리였었나 보다. 그 골방에서 s는 장난감 대신 민주주의니, 자유니, 혁명이니 하는 수수께끼 같은 문자들을 그림책의 그림처럼 보고 외우며 말이 많은 아이로 자랐던 듯하다. s는 특히 책 어딘가에 누군가가 끼워놓았던 보라색 책받침에 적힌 윤동주의 서시를 그렇게도 잘 외웠다. (그래서 그 동네 어르신들은 지금도 s가 천재라고 굳게 믿고 계시는데 슬프게도 s는 자신이 그 정반대의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s의 소소한 이 놀이거리는 s의 부모에게는 버거운 날들을 버티게 하는 큰 위로가 되었다. 주말이면 차 창밖으로 흔들거리던 s의 작은 손이 망막을 찔러 그토록 눈이 시렸다던 s의 아빠. 그 당시 아빠의 주사는 늦은 밤 잠든 s를 깨워 공중전화의 수화기 너머로 시 낭독을 듣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럴 때면 잠이 덜 가신 입으로 수화기에 대고 중얼중얼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하던 그 모습이 그렇게도 웃기고 신기했다며, 당시 중3이었던 둘째 삼촌은 마흔이 넘은 지금도 그 모습을 기억한다.     

"거봐, 거짓말 아니라니까. 우리 딸 이제 겨우 세 살인데 윤동주시를 외워. 이야, 근데 임마, 너는 쪼끄만 게 무슨 잎 새에 이는 바람이 괴로운걸 알어, 허허"    

s는 그 목소리가 귓가에 떠오를 때마다 자신에게 꽤나 심오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의 말이 그토록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앞으로의 인생까지 모두 통 털어 과연 몇 번이나 될까?’ 20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의 부서진 조각들을 꺼낼 때면, 엄마의 눈가에 반짝이며 어리는 그 파편들이 주름 사이사이를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로 메우곤 한다. 그렇게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은 s에겐 행복이었고 기쁨이었다. 말이 무지하게 많던 어린이는 자라면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보단 쓰는 것이 더 적성에 더 맞다 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종이위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27살이 되었다.


s는 왜 끊임없이 종이 위에 무언가를 떠들어대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나, 왜 글을 쓰는가. 굳이 합당한 이유를 찾자면 두 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글이 s의 오래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어디까지 표현해볼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 즉, 언어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시험해보고자 하는 것이며 이는 동시에 언어 속에서 태어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s는 언젠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말했던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에 관한 에피소드를 기억한다. 본인은 꽤 오랜 시간동안 시인을 꿈꿔왔었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던 은밀한 고백. 들은 바로는 그랬다. 20살, 처음으로 대면한 낯선 도시에서 맞이한 봄, 캠퍼스를 같이 내려가던 그 순간에 봤던 첫사랑의 얼굴을 그 어떤 말로도 집어낼 수 없었다고 했다. 지나온 거리가 무색하게 생생한 그 얼굴을 단어들의 짜임 위로 건져 올려 보면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어떻게 그물을 짜도 단 한 번도 그때 그 얼굴을 건져 올리지 못해서 시인이 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                 

 언어는 지시하는 대상, 시니피앙에 닿지 못한 채 끊임없이 그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언어로 삶을 포착한다는 것, 즉, 글을 통한 재현의 본질은 왜곡이고 은폐이자 변질이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인생의 문을 두드리는 그런 획기적인 순간들, 어떻게든 그 두드림을 간직하고자 그 어떤 미사여구와 단어들로 쥐려고 발버둥 쳐도 결국엔 그 손가락 틈새 사이로 어떻게든 흘러 나가버리고야 만다. 우리는 감당하기 벅찬 무엇인가를 마주 하게 되는 순간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는 말로 그것들을 표현하지 않던가. 이게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슬픈 운명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쓰고자 소망했던 것은 절대 쓸 수 없다는 역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s는 비장한 마음으로 결말을 알고 있는 이 운명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토록 존경하는 스승조차 해내지 못했던, 가늠조차 어려운 그 거대한 장벽에. 거창하게 말하자면 제신의 소굴을 향해가는 시지프의 심정으로.

L'emoi des  mots, 단어들의 마음, 내가 파리에서 제일 좋아하는 서점 중에 하나다



 s는 항상 고민한다. 사랑하는 것들은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예를 들자면, 여름의 입구에 맴도는 초저녁의 냄새, 여명의 하늘색, 일요일 오전의 평온함, 기나긴 하루의 고요를 깨는 수다, 자신도 모르는 새 웃음 짓게 만드는 모든 것들, 빛이 부서져 반짝거리며 반사되는 것들을 보는 기분.

  그렇다면 누군가를 슬프게 만드는 것들은 또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하는 걸까. 신촌으로 가는 버스 창밖에서 엄마가 사라지는 순간, 정당치 않은 비극을 떠안은 사람들, 멜로드라마, 더 이상 사랑이 남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연인의 눈, 사랑해서 관계를 끝내야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던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의 무게. 이런 것들을 위해 종이 위를 헤매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또 그 방랑이 즐거웠던 때가 한 때 있었다. 그러나 학점, 고시, 불합격, 취업과 같이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더 중요해지는 시간이 길 위로 몰아닥쳤다. 그러면서 s는 대학을 졸업했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만나지 않게 되는 일들이 점점 잦아졌으며, 테두리 밖을 꿈을 꾸는 것이 더 이상은 가치 없는 일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 순간들을 더 자주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s의 인생에는 무수하게 많은 크고 작은 구멍들이 생겨났고 글을 쓰지 않는 날들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자기가 있어야할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s는 무엇이 왜 아픈지를 몰라 아픈 시간들이 s에게 찾아왔다.


 책의 겉표지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사람들처럼 무언가 자랑스럽게 꺼낼만한 그런 고상한 계기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s에게는 다시 글을 쓰게 된 번듯한 이유가 없었다. 물론 길거리를 지나치다가, 혹은 책장을 훑어보다가 한 때 가슴을 뛰게 했던 그런 시인들의 구절들을 다시 발견하고 한 두 구절을 손닿는 가까운 어딘가에 묻어두고 언젠가 꺼내보리라 다짐을 하는 일들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 구절들이 다시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진 못했다. 학교를 떠나야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것이 무엇인지를 찾지 못했던 s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학업에 대한 열정이 강해서라기보단 학교를 떠나 ‘나’를 단 한 번도 몰랐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자기소개서에 익숙하지 않은 거짓말을 미처 지어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익숙하고 안전하리라고 자신했던 그 길의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장벽과 장벽 앞에서 마주할 익숙한 낯섦과 외로움들을 그 당시의 s는 몰랐을 것이다. 익숙하고 사랑했던 것들을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부수고 재단하던 s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구멍이 s는 고개를 돌려보려 여태 노력했던 그 구멍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구멍을 정면으로 마주한 자신의 옆에서 공백을 함께 애도해주는 것들이 자신을 괴롭게 했던 과거의 모든 것들이라는 것 또한. s는 그 애도에 감사를 표하고자 하는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그 모든 것들, 먼 길을 돌아 위로와 추억의 얼굴을 보여주는 ‘나’의 경험들. 부모도, 출신지도 모르는 채 태어나 이야기가 되지 못해 방황하다 죽어간 내 과거의 조각들이 이제는 이야기가 되기를, 그들에게 번듯한 묘비를 하나씩 세워주고자 하는 것, 그게 s가 다시 글을 쓰고 싶어 하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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