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상사 뒷담화가 아니다
사르트르가 그랬나. 응시하는 주체에게는 권력이 생기고, 응시 당하는 대상에게서는 그러한 힘이 박탈당한다고. 나는 오늘도 회사에 앉아서 이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곤 한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자유롭고 수평적인 소통이라는 명목으로 요즘 회사들이 그렇듯 파티션을 다 없애 버렸다. 그나마 먼지만큼 존재하던 개인적인 공간이란 쿼크단위 만큼 사라져버려 순식간에 매분 매초 응시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안 보는 척하면서 종종 내 모니터를 살펴보는 옆자리 상사는 꼭 내가 일 외의 것들을 할 때(예컨대 카카오톡) 내 모니터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원래 존재하던 권력관계가 다시 한 번 표면에 드러나는 것에 불과하므로 어쩔 수없이 감내해야 할 부분이지 유난 떨 부분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꺼림칙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제 기침과 콧물을 사방에 튕김으로써, 한동안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감기를 옮아버려서? 아니면 자기 일이 힘들다고 안그래도 모두가 힘든 회사에서 하루 종일 사무실이 떠나가라 한숨을 쉬고 있다는 것 때문에?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가 부장이 없을 때 끊임없이 내게 거는 스몰토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어제 그는 자리에서 부장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10분 간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명품의 브랜드와 가격과 역사와 트렌드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루이뷔통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 이야기에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루이뷔통으로 인해 대갈통이 깨질 것만 같은 기분만 들었고, 관심없는 이야기에 반응하느라 일할 힘을 다 소진하고야 말았다.
또 다른 이야기는 자신이 본가에 내려갔을 때 어떤 일들을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놀랄만큼 궁금해지지 않았던 그 이야기를 만약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했다면 기분이 조금 달랐을까 상상해보지만 남이 관심없는 이야기를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하는 사람이라면,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난 것이라도 그 백마를 내가 타고 도망치고야 말았을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는 출근한지 1시간만에 대략 13번의 한숨을 쉰 것 같고, 방금 막 14번째 한숨을 쉰 것 같다. 이런 이야기도 회사 사람과 못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냐는 그 분이 할 법한 말씀이 떠오르지만, 이야기의 기본은 상대방이 관심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자기 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고, 그게 안 되면 입을 닫고 있는 것이 모두의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사실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신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신께서 입은 하나고, 귀를 두개로 만든 것은 저런 잡소리를 두 배로 경청하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