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음식을 떠올렸을 때 그 음식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이 먼저 떠오를 때가 있다. 내게는 돈가스가 그러하다. 지난밤 돈가스가 먹고 싶은 마음에 신랑과 이야기를 하다가 어릴 적 먹었던 돈가스와, 우리 가족이 돈가스를 먹으러 자주 갔던 레스토랑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레스토랑은 아빠가 근무하셨던 회사 근처의 문화 센터 1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유리관 안에 큰 배 모형이 들어있었고, 오픈 키친 형태의 부엌에서는 흰 모자를 쓰고 계시는 요리사 아저씨들께서 요리를 하고 계셨다. 나무로 된 긴 식탁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노란 조명 빛들이 반짝이던 그 레스토랑이, 그리고 그곳에서의 즐겁고 따뜻했던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렇게 행복한 그때, 나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메뉴 선택이었다. 중식당에서 자장면과 짬뽕을 고민하듯, 나는 돈가스와 스파게티 중 무엇을 먹을지를 항상 고민했다. 둘 다 먹고 싶기도 했지만 어린 내가 고민을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스파게티를 먹고 싶으면서도 돈가스와 함께 나오는 수프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의 고민은 아빠의 한 마디에 해결되었다. 아빠가 돈가스를 시켜서 수프를 줄 테니 스파게티를 시켜 먹으라는 것. 나는 스파게티를 시켜 맛있게 먹으면서도, 아빠가 주신 수프와 잘라 주시는 돈가스까지도 맛있게 먹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아빠는 스파게티보다 돈가스가 더 좋아서 돈가스를 주문하셨던 게 아닐 것이다. 어린 딸이 먹고 싶어 하는 수프를 위해 돈가스를 시키신 것이었고, 그 돈가스와 함께 나오는 수프를 나에게 양보해주셨다.
어릴 때에는 그것을 당연히 여겼고, 아빠도 수프를 먹고 싶은 순간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문득 신랑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식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내어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에 그리 하신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프가 나오면 정성껏 조금의 후추를 뿌리고, 혹시나 뜨겁지는 않을까 숟가락으로 저으며 후후 불어주시던 아빠의 모습. 그렇게 후후 불어 건네주신 수프를 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시는 아빠의 모습. 그때 아빠의 얼굴에 띤 미소가, 따뜻했던 눈빛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빠가 나에게 주셨던 것은 비단 그 수프뿐 만이 아닐 것이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늦게 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는 딸을 위해 아빠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 10시가 되면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때는 아빠가 데리러 오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아빠는 그 시간들을 위해 포기하시는 것들이 많았다. 요리를 잘하는 엄마 덕에 반주를 즐겨하시는 아빠는 평일에 늘 반주를 포기하셨고, 퇴근 후 동료들과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함께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내는 시간들도 포기하셨겠지. 재미있는 티비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한창 재밌을 시간에 끊고 나오셔야 했고, 조금은 피곤해 일찍 잠들 수 있었던 날들에도 졸린 눈을 비벼가며 10시가 다 되기를 기다리셨을 것이다.
내가 대학에 가서 서울 살이를 할 때에도 캐나다에 영어 공부를 하러 갔을 때에도, 딸에게 조금 더 넉넉한 용돈을 보내주시기 위해 아빠는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물건들을 다 포기하셨을 것이다. 내가 편해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아빠가 힘들어지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사실을 그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기가 참 어렵다.
어쩌면 아빠가 내게 건네주신 수프에는, 그리고 아빠가 나를 위해 쓰신 그 모든 시간들에는 이런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딸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딸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 단지 한 그릇의 수프가 아니라, 그 안에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담긴 수프를 먹으며 나는 자랐다.
내가 그 레스토랑에 갔던 날들을, 그리고 그곳에서 먹었던 돈가스와 수프를 지금까지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것은 아빠가 따뜻한 수프와 함께 나에게 주신 애틋한 마음과 사랑 덕분이겠지. 그 마음에 감사함을 듬뿍 담아 이 글을 올린다. 아빠, 너무나 사랑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