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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허정 Aug 26. 2020

눈물 없이는 카스타드를 먹을 수 없는 이유

할아버지와 먹은 마지막 카스타드

누구나 자신을 예뻐해 주신 누군가를 마음속에 담고 있을 것이다. 특별히 나를 애정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니까. 나에게도 그런 분이 있냐고 묻는다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바로 나를 끔찍이도 아끼시던 할아버지다. 


나는 막내의 막내로 태어났다. 6남매 중 다섯째인 아빠가 그 당시로서는 다소 느지막이 낳은 막내딸. 그렇기에 나는 할아버지의 수많은 손자들 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이 상대적으로 제일 짧았다. 자식이든 손자든 막내를 보면 늘 안쓰럽다는데, 자신과 보내는 시간이 가장 짧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본인을 쏙 빼닮은 막내 손녀가 그리도 예뻤는지, 할아버지는 늘 나를 곁에 두셨다. 수많은 사진 속에서, 그리고 많은 얘기들 속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산에 사셨던 할아버지께서 내가 보고 싶어 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울산까지 올라오셨던 날들, 할아버지의 생신 날 유일하게 할아버지의 생신 케이크의 촛불을 같이 끄게 해 주셨던 것, 막내인 내가 무서운 것 없이 언니 오빠들에게 당차게 굴 수 있었던 일들. 이 모두가 할아버지가 나를 끔찍이 여기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오랜만에 만난 유치원 선생님께서도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셨다. 가끔 할아버지가 데리러 오시는 날에는 유치원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갔는데,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뒷모습이 그리도 좋아 보였다고. 할아버지는 사랑으로 가득 찬 두 눈으로 손녀를 바라보셨고, 그 사랑을 받고 자라는 손녀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워 보였다고.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신문을 읽으시고, 자전거를 타고 해운대 바닷가까지 매일 갔다 오시는 할아버지 셨기에 나는 그 순간들이 영원할 줄만 알았다. 내가 첫 월급을 타는 날에도,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가 되는 날에도 할아버지가 곁에 계실 줄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점점 기력이 없어지시고, 우리가 누구인지 물어보셨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아무 탈 없이 건강하시다는 게 어려운 일인 줄은 알았지만, 막상 그 일이 닥치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토록 사랑하셨던 손녀에게 누구인지 물으시고, 얼른 가라고 하시다니. 그렇게 정정하셨던 할아버지가 어느새 두 팔과 다리에 힘이 없고, 자식들과 손주들의 도움 없이는 화장실도 가기 힘드실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종교도 없는 나였지만, 다시 예전의 건강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되돌려달라고. 나는 아직 할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의 반의 반도 돌려드리지 못했으니 제발 다시 건강하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뵐 때마다 점점 더 쇠약해지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돌아오는 길에는 늘 눈물을 훔쳤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는 입맛이 없으셔서 한 가지밖에 드시지를 못하셨다. 그게 바로 카스타드였는데, 우리 식구들은 모두 할아버지 댁에 갈 때마다 양손 가득 그 카스타드를 사 갔다. 할아버지 앞에 앉아서 카스타드를 하나 까서 드리면 이제는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한 때는 너무나 사랑했던 손녀에게도 하나 먹어보라고 카스타드를 건네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마주 앉아 카스타드를 나눠 먹었고, 나는 그때마다 울산 둘째가 왔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우리가 사갔던 카스타드를 다 드시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살아계실 때 왜 조금 더 찾아뵙지 못했을까, 할아버지가 해주시는 말씀이 왜 잔소리처럼 들렸을까 후회만이 남았다. 할아버지가 주신 사랑만큼,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딱 그만큼의 아픔과 후회가 남았다. 


첫 월급을 받았던 날,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날, 할아버지와 비슷한 중절모를 쓰고 가시는 다른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어느 날. 나는 언제나 마음속에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이제는 마트에서 지나가면서 조차 카스타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그리고 눈물 없이는 카스타드를 먹을 수 없는 이 손녀를 할아버지는 지켜보고 계실까. 


할아버지, 너무 사랑하고 너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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