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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 Jul 07. 2024

스물넷, 봄과 함께 시작된 여정

봄이었다. 기대하고 고대했던 봄. 서울에서 보내는 첫 봄은 어떨까 너무 설레었다. 여의도 벚꽃, 한강 피크닉, 인스타 감성 등 청춘들의 도파민을 뿜뿜 하게 할 자극요소이다. 같이 일하는 막내언니와 아이템 준비를 하며 연예인만 봄을 즐기는 게 아니라 우리도, 바쁜 일이 끝나면 우리끼리라도 시간을 내어 앞에 공원이라도 하다 못해 카페에 앉아 빵과 음료라도 먹으며 잠깐의 봄을 만끽하자며 약속했다.


잔인하게도, 예정되었던 게스트의 출연이 취소되면서 아이템도 불발이 되었고 일정이 꼬여버렸다. 고정출연자 스케줄 이슈도 겹치면서 2주 연속 촬영이 잡히면서 살인적인 스케줄이 진행되었다. 심지어 게스트는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닌 여섯 명. 장소와 아이템을 비롯해 게스트(출연자) 자료조사 등등 할 일이 태산이었고, 스트레스는 배가 되었다. 모두가 초예민 상태가 되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한 번쯤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게 나에게, 오늘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렇게 큰 산을 하나 넘었다. 그 산을 넘었더니 다른 장애물들이 나를 괴롭혔다. 일명 막내 괴롭히기. 간호사의 '태움' 문화처럼 스트레스를 아랫연차에게 푸는 알음알음 문화가 있다. 물론 내가 소속되어 있던 팀의 모든 선배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무실을 옮기게 되었는데, 이삿짐을 혼자 꾸리게 하고 그 모든 짐을 다른 건물의 사무실까지 혼자 옮기라고 시켰다. 같이 도와준다는 막내언니에게는 도와주면 가만 안 두겠다는 말까지 했다. 덧붙여보자면, 어떤 선배는 당당하게 '라떼는'으로 시작해서 "선배들이 엄청 괴롭혔고 그래서 나는 당한 만큼 나도 돌려줄 거야. 그걸 왜 나만 당하니? 나는 미리 말했다. 나한테 거슬리는 행동하지 마~"라고 선언 아닌 선언을 한 선배도 있었다. 너무 웃겼던 건, 그 당시에 나는 억울하지만 내가 왜 못해내냐는 오기가 생겨 그걸 또 해냈다.  정말 바보 같은 행동이었지만. 그리고 이것이 정말 큰 화를 불러왔지만, 그때는 몰랐다. 정말 몰랐다.


이사를 마치고 새 사무실에 기존 물건 세팅과 새 비품, 새 사무실 청소, 무선 프린트기 설치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할 것 투성이었다. 당연히 출근시간 보다 이른 출근과 야근은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밥은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감사한 일이 되었다. 탄력적 출근일 때도 일이 많아서 많이 자야 4시간에 하루 한 끼, 햇빛도 거의 못 보고 운동과 산책은 꿈도 못 꿨다. 인권은커녕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 그냥 생각이란 걸 안 하고 살았던 것 같다. 하루를 버티는 것에 의의를 뒀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말 아침이었다. 알람이 울려서 눈을 떴는데, 앞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알람을 새벽시간대로 잘못 설정한 줄 알고 다시 누웠다. 그런데 10분 뒤에 다시 알람이 울리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빅스비를 불렀다. 빅스비에게 시간을 물으니 새벽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상한 건 내 눈이었다. 눈앞이 뿌옇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사고가 정지됐다.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사고나 병으로 시력이나 청력을 잃으면 충격으로 오열이나 소리부터 지르기 전에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멈춘 것처럼, 내가 그랬던 것 같다. 하필 집에 아무도 없었다.


내가 이 순간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병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내가 봉사를 많이 다니기도 했고 관심이 많아서 장애인 관련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초급 수어 과정도 수료했고, 시각 장애 관련해서도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더듬더듬 대충 씻고 택시 호출을 해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얼굴 전체가 염증으로 가득 찼고 그 염증이 눈까지 가득 차서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내게 보통 이렇게까지 염증이 찰 때까지 모르기도 쉽지 않다며 몸을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우선 눈이 안 보이는 것도 해결해야 하고, 염증이 계속 있으면 시력 저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치료가 시급하다고 했다. 주사도 맞고 치료도 했다. 치료 후 시간이 조금 지나니 조금 뿌옇긴 해도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단지 여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치료 후 다시 최종 처방을 받기 위해 다시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내게 염증이 조금 가라앉아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대뜸 내게 거울을 건넸다. 나는 너무 당황스럽지만 받으며 이걸 왜 주냐고 물었다. 의사는 내게 "환자분은 지금까지 눈이 안 보여 몰랐겠지만, 병원 내원 당시부터 지금까지 왼쪽 안면에 미세한 경련이 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안면의 염증 때문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혹시 모르니 신경과나 신경외과에 내원해 진료나 정밀검사를 받아보시는 것을 권유드립니다. 의사소견서도 써드리겠습니다. 하루 이틀 지켜보시고 경련이 멈추지 않으면 꼭 가보십시오"라고 했다. 너무나 당황스러워 얼른 거울을 보니 정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끔찍했다. 경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이 밀려있었기에 병원에서 들었던 눈과 관련된 이야기를 언니들께 말씀드렸다. 당황스러우셨을 거다. 막내가 대뜸 전화해서, 언니 저 눈이 안 보여서 병원 다녀와서 일해도 될까요? 였으니. 꾀병 아니냐고 의심하는 선배도 있었다. 나라도 의심했을 법도 하다. 흔한 케이스는 아니니까. 같이 일하는 막내 언니는 내게 배려를 해줬다. 눈이 보이기는 해도 아직 잘 안보였기 때문에 죄송했지만 난 그 배려를 받기로 했다. 다음날, 다행히 약을 먹고 오랜만에 푹 자서 그런가 눈이 보이기 시작했고 밀린 일을 다시 했다. 경련은 여전히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라 가볍게 넘겼다.

그리고 다음 날 사고가 크게 터졌다. 자고 일어났더니  경련의 빈도가 더 심해지고 이제 아예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저주인 건가, 내가 전생에 나라 아니 지구를 망가뜨렸나?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아침부터 내가 해야 하는 첫마디는 "죄송합니다, 병원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였다. 정말 나는 미안했을까, 누구에게 미안했을까? 이쯤 되니 난 무얼 위해 일을 하는 건가 싶었다. 집 근처 종합병원 신경외과에 갔다. 불행에 불행이 겹친 게 이런 것이라고 할까? 아무리 운명의 장난도 이렇게 유치하고 비겁하게는 안 할 것 같다. 의사가 나를 보며 했던 첫마디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얼굴, 일부로 이렇게 하는 거죠?" 나는 그 순간 귀를 의심했다. 분명 내가 자고 일어났더니 계속 이렇게 의도하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움직여서 왔다고,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냐고 했는데, 내게 일부로 하는 거냐며 꾀병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면서 물었다. 옆에 이모가 보호자로 함께 있었는데, 이모는 의사에게 지금 그게 의사가 할 소리냐며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


의사는 종종 보험 때문에 일부로 경련 환자인 척 거짓말 치는 경우가 있어서 그랬다며 그제야 진지하게 나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나는 화가 났지만, 급하고 간절한 건 나였기에 다시 증상을 말했다. 의사는 MRI 검사 후 진료 일정을 다시 잡자고 했다. 가장 빠른 검사 일정이 한 달 후라고 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냥 이러다가 죽는 게 더 빠르겠다 싶었다. 검사 예약을 해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바로 출근했다. 나는 신경이 쓰였지만 계속 일을 했다. 언니들은 내게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아직은 버틸 만은 하다고 했다. 하지만 경련은 나날이 더 심해져만 갔고, 밥을 먹을 때 음식이 한쪽으로 흘러나오는 지경까지 갔다. 그렇게 주말이 다시 돌아왔다.


토요일 아침, 경련의 절정이 찾아왔던 것 같다. 도저히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신경외과로 유명한 대학병원을 검색해 무작정 응급실로 향했다. 코로나19로 응급실 진료도 쉽지 않았을 때지만, 이러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았다. 경련도 경련이지만 몸에 무기력도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 의사소견서와 평소 대학병원에서 먹는 약과 약처방전을 들고 응급실에서는 처음에는 마스크에 가려진 내 생태만을 보고는 멀쩡한 것 같다고 생각해 왜 왔는지 의아해했다.

그러나, 진료를 위해 마스크를 내린 순간 초진차트를 쓰는 응급의학과 의사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대뜸 내게 언제부터 이랬냐고 물었다. 미세한 경련은 일주일 전부터 심한 건 이틀 정도 되었다고 대답했다.


의사의 표정이 더 굳었다. 안면 경련은 뇌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클뿐더러, 경련의 골든타임은 최소 이틀, 운이 좋아야 최대 일주일이었다. 그 마지노선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병원에 방문한 것이었다. 코로나19 검사를 하자마자 바로 베드로 안내되었고, 각종 검사가 진행되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몰랐지만 직감상으로는 심각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의사가 깨워서 일어나 보니 뇌 관련 MRI 등을 비롯해 여러 검사를 하기 위해 이동할 것이라고 했다.


이제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고, 죽기 싫었다. 억울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착한 어린이로, 학생으로 살았고 대학 졸업해 취업했다. 사춘기 때도 사고 한 번 치지 않았고, 취업 후에도 개 같이 일했다. 농땡이 한 번 안 피웠다. 스물넷, 죽기 너무 억울한 나이였다. 그리고 그놈의 벚꽃이 뭐라고, 그거 못 본 게 그렇게도 억울했다. 베드에 실려 검사실로 이동하는데 주마등처럼 지나온 일들이 쭉 스쳐 지나갔다. 눈물이 났다. 차마 부모님께 연락을 드릴 수도 없었다. 하필 가족여행을 간다고 했는데, 그동안 바빠서 연락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고 얼굴도 못 봤는데 그렇게 일하다가 이렇게 결국 쓰러졌다고 어떻게 연락을 하나 싶었다. 그냥 모든 게 다 억울했다. 이 상황이 너무나 원망스러웠지만, 원망할 대상이 없었다.


모든 일은 속전속결이라고 했던가? 안 좋은 일도 그런가 보다. 검사 결과도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의사는 내게 뇌에 종양이 있는 것 같다며, 수술을 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문제는 위치가 안 좋다는 건데, 수술 도중 시력과 청력 둘 다 잃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시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종양의 위치가 시신경과 거의 근접해 있다고. 종양이 아주 미세하게 조금만 더 컸다면 눈도 안 보였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 뒤로 의사는 계속 설명했지만, 내가 기억나는 건 대화의 마무리쯤의 말이었다. 과연 대화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래 의사의 독백이 맞겠다. 펠로우 의사는 내게 젊으니까 경과가 좋을 거라며, 병원에서 이 분야 최고 선생님을 본인이 책임지고 모셔오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다 잘 될 거라고. 그렇게 멍하니 한 참을 있었다.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중년의 의사가 펠로우 의사에게 짜증과 잔소리를 하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의사는 내게 펠로우 의사와 아는 사이냐고 했다.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다. 알고 보니 의사는 거의 또래뻘의 나이인 내가 충격에 빠져 얼굴이 질려있으니 나름 응원과 격려도 건네고 당직도 아닌 관련과 교수를 감히 모셔온 것이었다. 중년의 의사는 내게 정밀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밀검사가 진행되려면 당장 입원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렇게 나는 바로 입원을 하게 된다.


 입원하자마자 동의서부터 사인하고, 피검사를 진행하였다. 알레르기가 있었기에 식단도 체크를 해야 했고, 평소 먹고 있던 약도 있었기에 절차가 복잡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 순간조차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던 경련과 뇌기능개선제 주사였다. 그 주사는 몸에 들어가는 순간 척추부터 목에 이어 머리까지 들어가고 어디로 이동하는지 다 느껴졌고 너무 역겨웠다. 때때로 구역질도 났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절대로 질 생각이 없었다.


잠시 후, 전화기를 들었고 메인작가님께 전화를 드렸다. 너무 죄송하다고. 응급실에서부터의 사정을 설명드렸다. 사실 어제까지도 일 계속할 수 있냐고 물으셨고, 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아니었다고. 너무 죄송하다고. 말하다 보니, 눈물이 났다. 메인 작가님도 같이 울었다. 제일 어린 네가 너무 안타깝다고. 언니도 이 상황에 너무 놀란 상태인데, 너는 오직 하겠냐고. 그런 언니께 당장 다음주가 촬영인데 너무 죄송해서 할 말이 없다고. 인수인계 제대로 하겠다고. 혹시 몰라서 노트북을 챙겨 왔다고 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만큼 책임지고 다 돕겠다고. 그렇게 한참을 같이 울었다.


한참 있다가 다른 선배께 연락이 왔다. 그 선배는 전화를 하자마자 대뜸 화부터 냈다. 네가 너무 짜증이 난다고. 선배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당장 촬영을 앞두고 있는데, 다름 아닌 막내 자리가 펑크 났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짜증이 났을까. 대타를 못 구하면 선배들 중 한 명이 막내 자리를 채워야 하는데 그럼 고생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의 수위는 더 높아져만 갔다. 너 같이 무책임한 애들이 너무 싫다고. 나 때는 아파도 현장에서 쓰러졌지 병원을 먼저 갈 생각을 못했는데 요즘 애들은 참 나약하다고. 참 비겁하게 메인작가에게 먼저 연락한다고. 너 같은 애들이 아픈 거라고. 너 같은 애들은 죽어도 할 말이 없다고. 아픈 건 나고, 진짜 죽게 생긴 건 난데 저런 짜증을 더 이상 들어주기도 싫었고 참아주기도 싫었다. 그래도 최대한 예의는 지키고 싶었다. 갑자기 상태가 심각해졌고 저도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너무 죄송하다고. 특히 제 몫까지 두 배로 감당해야 되는 막내 언니께는 따로 사과 연락드리겠다고. 그래도 메인작가님께 먼저 연락드렸던 건 단톡에 간단히 상황설명 남겼을 때 먼저 연락 달라고 남기셨기 때문이었다고. 그 선배는 끝까지 그냥 모든 일의 원흉이 나라고 했다. 너 같은 애 하나 때문에 인생이 꼬인 거라고. 그 따위로 살지 마라고.


전화를 끊고 말 그대로 뇌정지가 왔다. 이건 신의 벌일까? 신의 테스트일까? 이건 아무리 신이라도 나한테 너무한 게 아닐까? 그래서 결국 나한테 살라는 거야? 죽으라는 거야? 싶었다. 혼란과 혼동의 소용도리 속에서도 여전히 살고 싶었고, 억울했다. 세상이 날 억까하는 것 같았다. 늘 열심히 살아온다는 칭찬을 들어왔고,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부끄럼 한 점 없이 살았다. 봉사도 많이 했고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좋은 마음으로 많이 베풀기도 했었다. 그런데 결국 내게 돌아오는 것이 이런 거라고? 너무 비참했다. 날 더 비참하게 만들었던 건 수술한다고 해도 시력과 청력을 잃게 되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그럼 죽는 게 더 낫나? 어째서 내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거지? 모든 게 다 끔찍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내 사람들에게. 일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우리의 관계가 소홀해져서. 그 흔한 안부조차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 그래서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연락하지 못했는데 아프니까 연락하는 건 너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이게 내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족 여행을 간 부모님께는 간단하게 말씀을 드렸다. 왜 입원을 하게 되었는지, 아직 정확한 검사 결과와 병명, 수술 일정이 잡히지 않았으니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코로나19로 면회도 불가한다고. 그렇게 나는 결정된 것 하나 없는 그 순간들에 머리로는 버텨내고 이겨낼 수 있다고, 이길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마음으로는 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내가 떠나고 난 후 남겨질 사람들을 위한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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