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하반기에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갈 계획이다. 로스쿨 입학 시험을 시원하게 말아먹어서 자소서 쓸 필요가 없어져 여행 갈 여유가 생겼다. 시험 공부 하는 동안 이미 부모님 돈 몇천만원을 썼기 때문에 여행만큼은 직접 돈을 벌어 갔다오고 싶었다.
시험이 끝나니 친구들도 만나고 하고 싶은 게 많아 날짜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알바가 필요했다. 알바천국 어플을 켰다. 역시 쿠팡 일용직만한 게 없었다. 딱 1년 전 이맘때 처음으로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알바를 갔다온 후 며칠간 온몸을 두드려맞은 기분이 들었는데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근육통보다 통장에 찍힌 돈이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결국 올해도 쿠팡 물류센터에 지원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일하다 죽은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일하다 죽는 것만큼 억울한 죽음은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오늘 일하면서 처음으로 일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타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께 했던 일보단 힘들었지만 어차피 상자에 분류하고 적재해서 레일에 올리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쉬는 시간만 간절히 기다렸다. 쉬는 시간이 되니 다른 건 전혀 눈에 안 들어왔다. 오늘 번 돈으로 유럽 어느 나라에 가면 좋을지 휴게실에서 미친듯이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옆 테이블에선 한 아주머니가 다른 아주머니들에게 옥수수를 나눠주며 서로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밥 시간을 놓쳐 하루종일 먹은 게 아이스크림이랑 계란밖에 없어서 배고팠지만 그저께 관리자들이 나눠준 도넛이 또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쉬는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두번째 타임이 왔고 2시간 30분만 더 버티면 된다는 생각만 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엔 처음부터 물량이 쏟아졌다. 쉴틈없이 물건을 분류하고 적재하다보니 어제 필라테스 선생님이 열심히 내 허리를 돌려준 보람이 없게 허리에 통증이 생겼다. 목이 타가는데 쉬는 시간에 채워둔 물통마저 못 가져왔다. 체념한 채로 포장되어있는 세제, 책, 쌀 가마니 등을 옮겼다. 분류해야 되는 양이 이미 노동량을 초과해 분류 안된 박스가 키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던 아주머니께서 관리자에게 일손이 부족하다고 얘기를 하셨는지 건너편 라인에서 일하던 사람 2명이 왔다. 다른 데도 바쁜데 부탁 때문에 사람 2명을 보냈다고 관리자가 선심 썼다는 듯이 말했다.
내 발작버튼은 다른 데서 눌렸다.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과 나는 관리자 얼굴을 쳐다볼 틈도 없이 바빠 눈은 물류 번호에 고정하고 손은 물건을 빠르게 해당 번호에 맞는 박스로 옮기고 있었다. 관리자는 자신도 바빠서 일을 도와줄 수 없다며 한가하게 옆에서 5분간 혼잣말을 떠들어댔다. 분풀이대상은 애꿎은 물건이었다. 그때부터 농구 선수에 빙의하여 내 키보다 높이 있는 박스엔 손목 스냅을 이용하여 물건을 낑겨넣었다. 박스는 이미 다른 물건들로 가득 차있었지만 그 박스를 정리하고 다시 물건을 적재하면 할 일이 밀릴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박스 용량을 초과해 아슬아슬하게 걸터져있는 물건을 애써 무시하고 추가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일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빠른 리듬감으로 물건을 옮기기만 했다.
마라톤을 할 때도 오버페이스 하는 순간 말린다. 내 페이스를 초과해서 일을 하다보니 갑자기 속이 메스꺼웠다. 폭염경보가 내린 날 무리해서 일을 해서였을까. 물건으로 꽉 찬 박스를 내려서 레일로 옮겨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났다. 물이라도 마셔야 하는데 하필이면 물도 휴게실에 놓고 왔다. 몸이 계속해서 사이렌 신호를 보냈지만 이미 추가 인력도 빠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까지 빠지면 아주머니 둘이서 일을 하고 있어야 했다. 더운 날 아주머니들도 무거운 박스를 수백번 옮기다보니 돌아가면서 곡소리가 나고 있었다.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그분의 물을 조금 마셨다. 얼굴이 창백하다며 물 다 마시라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건네주신 그 말씀이 너무 감사했다. 하지만 몸은 감사한 마음과 별개로 계속 지탱할 곳이 필요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결국 아직 쌓여있는 박스를 모른 척 하고 잠시 휴게실에 가서 바로 물 500ml를 들이마셨다. 시간을 보니 퇴근까지 10분 남았다. 이미 다른 라인 사람들 중 몇명은 퇴근 중이었다. 다시 라인으로 복귀해서 남은 힘을 쥐어짜 박스를 채우고 있으니 관리자들도 일을 거들었다. 퇴근 시간이 몇분 안 남았는지 갑자기 큰 소리로 얼른 퇴근 인증을 하라며 닦달했다.
"그러게 아까 미리미리 일 좀 하지."
휴게실에 있는 핸드폰을 찾으러 가는 길에, 한 손에 커피를 쥐고 있던 그 관리자의 목소리를 들으니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반바지를 입으니 다리 곳곳에 멍이 들어있었다. 아까 같이 일하던 한 아주머니는 이 일을 1월부터 했다고 한다. 난 고작 이 일을 이틀 했다. 폭염경보 문자가 살벌하게 날아오는 이 여름에, 바깥과 연결돼있는 작업 공간에서 더운 선풍기 바람만 맞으며 해야 되는 이 일이 누군가에겐 선택이 아니라 필요한 일이겠지. 쿠팡 같은 물류센터에서 여름에 일을 하다 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8282'의 민족에게 로켓배송이란 엄청난 서비스가 있지만 그 대가로 공장에서 갈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나는 일급을 자유롭게 챙길 수 있어서 할 말은 없지만 과연 이보다 더 나은 일자리가 있을 순 없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