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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영 Sep 30. 2021

할머니, 우리 친해질 수 있을까요?

上 편

외할머니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유치원생일 때 살았던 거제도 빌라에 머물러 있다. 영상으로 치면 두세 프레임뿐인 기억이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숟가락에 밥, 멸치볶음, 김치 등을 차곡차곡 쌓아 한입 가득 먹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나한테 칭찬을 퍼부었다. ‘왜 이런 걸로 칭찬하시지….’ 싶은 머쓱한 마음에 기억하는 듯하다.    

  

6살 때 서울로 올라와 외할머니, 엄마, 오빠랑 같이 살았다. 아빠는 거제도에 남았고 주말에만 서울에 왔다. 밥벌이하는 엄마 대신 할머니가 날 돌봐주셨다. 그 당시 할머니는 내게 무서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아파트 2층에 목욕탕이 있었는데 거의 매일 할머니랑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중 유일하게 기억나는 때가 목욕탕에서 할머니가 고래고래 소리 지른 날이다.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순간만 기억한다. 할머니 입장에선 섭섭할 거다. 뒷바라지해준 시간은 쏙 빼고 이런 기억만 있다고 하니.     


할머니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해서 효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난 효와 거리가 멀다. 교육열에 지배된 가정에서 학창시절을 보내 일종의 ‘말 없는 독불장군’이었다. 부모님은 때론 예의 없는 내 모습을 ‘애가 학원과 공부에 치어 피곤하겠지’라는 핑계로 덮어주었다. 니가 싸가지 없던 걸 왜 부모 탓하냐고 할 수 있는데 그 말도 맞다.     

 

부모님과도 대화가 없었는데 할머니랑은 오죽했을까. 대화가 없던 만큼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래도 늘 할머니 건넛방에 살았던 식구로서 보고 들은 건 있다. 할머니의 이미지를 잘 표현해주는 영화 제목이 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이 제목보다 할머니를 명료하게 설명할 순 없다. 우리 집안 종교는 천주교다. 오롯이 할머니의 영향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는 ‘기도의 힘’으로 버텼다고 한다. 남편 죽은 여자가 너무 멀쩡하니 주위에서 이상한 말이 돌 정도였다. 할머니랑 통화하면 가장 먼저 듣는 말은 “평화를 빕니다”. 15년째 듣다 보니 이젠 평화가 친구랑 밥 한 끼 먹는 것만큼 쉽게 느껴진다. 몇 달 전 우리 집 새 식구가 된 새언니는 모두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할머니가 너무 귀여우시다고 한다.    

다시 보니 카톡 인사는 '평화와 선'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평화가 있기를..

  

막상 할머니의 ‘기도 강요’를 받으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진다. 삐딱했던 학창시절엔 태어날 때부터 집에서 강제로 정해준 종교를 믿어야 하는 게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할머니 손에 이끌려 주말마다 성당을 갔다. 중학생이 되고 나니 성당 가는 게 귀찮게만 느껴졌다. 할머니는 왜 성당을 안 간다며 은근한 압박을 주셨고 그게 불편했다. 할머니와 엄마가 싸운 이유도 늘 성당이었다. 할머니 손에서 컸지만, 엄마한테 친밀감을 더 느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할머니가 종교에 빠져 사는 모습에 거부감이 있었다.   

   

‘이대로 영영 할머니와 거리를 둔 채 살아가려나’ 하는 생각에 중고등학생 때 막연히 두려웠다. 뜻밖에도 고3 때, 할머니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생긴다. 아직 설명하지 못한 할머니의 두 가지 매력, ‘먹기와 사랑하기’. 할머니표 온정을 처음 느낀 고3 겨울, 할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달라졌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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