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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Oct 31. 2024

그가 떠난 후(2)

우리 힘찬 울타리

과정일 거다. 알고 있지만 늘 마음이 시리고 또 아리다.

그가 떠난 후 많은 일을 맡아 준 아들아이는 2주 휴가 후 바로 출근하며  일상에 복귀했었다. 퇴근 후엔 아빠의 모습이 담긴 사진틀을 식탁에 올려놓고 눈을 맞추며 저녁식사를 하곤 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너스레 쟁이였던 그의 아들답게 올해 서른 살 생일을 맞는 아들도 여전히 장꾸인 우리 막내이다.  


그가 떠난 후 우리는 저녁마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다. 말씀과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며 매번 마지막은 기승전 그,  그에 대한 추억을 서로 나누게 된다. 언제 가장 아빠가 보고픈 지 물으니 아들은  "뭔가 물어볼 게 있음 늘 '아빠~"를 부르면 됐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그리곤 애써 힘을 내듯 또 나와 제 누나에게 장난을 걸곤 제 방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견뎌내는 듯했었다. 어느 토요일 저녁, 가정 예배 후 세 식구가  리 가정의 루틴인 일주일치 장을 보러 슈퍼마켓에 갔었다. 딸아이와 내가 앞장서고 아들아이는 우리 뒤에서 카트를 밀고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가 바리스타 오트밀크와 오트밀 용 아몬드 밀크를 각각  집어 들고  뒤에 따라오던 아들의 카트에 담으려니 아이는 예닐곱 발자국 뒤쯤에서 웬 백인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아채고 얘기를 나누던 남자와 급히 작별인사로 마무리하는 듯하더니 카트를 밀고 우리에게로 왔다. 아는 사람이냐니까 아니란다. MLB  엘에이 다저스 팀 셔츠를 입고 있어서 오늘 승리한 경기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는 거다. 와 함께 응원하던 팀이라 부자간의 공통관심사였다. 그런데 이젠 그 얘기를 함께 나눴던 그가 떠나고 나니 아들은 슈퍼마켓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과 단지 그 팀 티셔츠를 입었으므로 대뜸 말을 건네었던가 보다. 순간  날카롭고 차디찬 얼음 조각이 마음속 깊은 곳을 배기라도 한 듯 시리고 아렸다.


그날, 의식을 잃은 그를 발견한 나는 급히 아들아이를 불렀고  아이는 111과 통화하며 CPR을 수행하였었다. 구급차를 타고 도착한 구급대원이 사망선고를 할 때, 절망하며 주저앉은 나를 보듬어 주었고 무겁고도 뜨거운 통곡을 함께 토해냈었다. 그를 위한 예배를 위해 급히 영상을 준비하며 이틀 전까지 함께 살던  아빠가 이젠 사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기이하기 조차한 현실을 반신반의하며   밤새 울었고 예배 때 가족을 대표해 추도사 순서도 맡았었는데  한국말과 영어로 준비한  추도사는, 제 말로는 온 힘을 다해 담담하게 또 그렇게  읽으려 애썼다고 했다. 아빠의 사진을 꼭 끌어안고 예배당을 떠나는 아빠를 따라가며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흘렸으나 숨소리마저 조심스레 참고 있는 듯했었다. 


그는 페인팅 용역 회사를 운영했었다. 갑작스레 떠난 그는 한 현장의 일을 마치지 못한 채였다. 장례절차를 마치자마자 아들은  그 현장의 일을 맡았던 하청업자들과 함께 작업을 재개했었다.  아이가  대학원  과정 때 잠시 그의 회사일을 도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 마지막 현장의 하청업자는 마침 그때 아들이 뽑았던 팀이었다. 쿡 아일랜드 출신인 그들은 5년여간 우리 회사와 함께 일해 왔었다. 크리스천인 그들 중 보스인 존은 최근 파트타임으로 신학공부를 하고 있는데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교회를 세우려는 비전을 품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 현장을 마무리 한 날 저녁, 아들은 그 팀의 페인터들과 존의 가족까지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만나기로 했다는 식당에 가기 전 우리 집에 먼저 들른 존과 그의 팀원들은 꽃다발과  애도카드를 그의 사진 옆에 올려두며 말을 잇지 못했었다. 그가 떠난  후, 몇몇 고정 고객들이 연락을 해왔을 때도 아들은 그 모든 통화를 통해 그의 소식을 무거운 마음으로 전해야 했었다.


아마 그가 떠난 후  달이 가까운  시점이었을 거다. 가정예배 마지막 순서로 기도 제목을 나눌 때였다.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고  그리고 "살릴 수 있었는데..."라는 혼잣말이 새어 나오곤 한다. 그 생각이 아이에게 죄책감을 덧씌우고 있었던가 보다. 생각에 빠질 때 아들의 얼굴은 비탄함으로 가득했다. 지난주는 거의 일주일 내 그랬었다. 한국에 있는 조카에게  보이스톡이 왔다.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조카에게 아들의 상태를 염려하였더니 제가 직접 통화를 하겠다고 다. 의사인 자신도 응급실에서 CPR로 환자를 회생케 할 확률은 20% 남짓이라고... 형과 얘기를 나눈 아들은 좀 나아진 듯했다. 그러나 그렇게  팩트를 받아들이고 이해는 했으나 여전히 그의 안색은 비탄의 빛깔이다. " 아빠가 없으니까. 이젠 여기 없으니까, 보고 싶으니까..."

노동절이 있던 긴 주말을 보내며 교회친구들과 반나절 간의  트래킹을 다녀온 후 마음이  다소 풀린 눈치다. 아니 여기저기 아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했었으니 이 또한 응답일 것이다.


우리 세 식구의 무드는 여전히 슬픔이다. 괜찮은 듯하다가도  다시 목이 매이고 눈물이 쏟아진다.  

텔레토비를 보고 자란 우리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간혹 나와 함께 텔레토비들처럼 "빅허그"라고 외치며 모여 서로 안아주곤 했었다. 아이들이 다 자란 후에도 일 년에 한 두어 번쯤은  그 추억의 빅허그를 하기도 했었는데 그가 떠난 후 우리 세 사람은 아이들의 어린 날처럼 빅허그로 서로를 보듬는다.


그와 공유하던 이 메일 주소는 nz4 kims로 시작한다. 이곳에서 시작한 4명의 김 씨라는 뜻으로... 4 Kims였던  우리가  이제 삼겹줄이 되었다. 전도서에 기록되어 있는 삼겹줄의  "쉽게 끊어지지 않는"이라는  수식 어구가 든든하다. 네 명의 Kim들이었던  가정이 삼겹줄의 시절을 지나  아들이 아빠가 되고 또 할아버지가 되어 또 다른 Kim들이 태어나면 이 가계의 이름은 NZ The Kims쯤으로 스케일이 확장될까? 그리고  그때 그들에게 nz4 kims의 아빠였던 그는 친절하고 따뜻했던 멋진 분으로 전해졌으면 한다.


참, 이 글의 제목인 힘찬 울타리는 아들의 이름 뜻이다.  언제나 막내로서 막내다웠던  아이에게  "언제쯤 이름 뜻처럼 힘차볼까?" 놀리곤 했었는데 그가 떠난 후, 아들은 제 이름값을 톡톡이 해내고 있다.


'아빠가 보고 싶은 맘이야 어쩌겠니. 너무도 당연하지. 그래도 엄마랑 누나는 우리 힘찬 울타리가 있어 몹시 든든하단다.. 그런데 너무 부담을 갖진 않았으면 해. 우리 집 가장은 이제 명실상부 하나님이시니.... 아빠께  궁금한 것을 묻고 문제를 해결했듯, 이젠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그리하며 살자꾸나. 사랑해, 아들~ 우리 힘찬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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