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오랫동안 여운이 남고 기억에 선명히 간직되는 영화가 있다. 나에게는 2014년 8월에 국내 개봉된 <비긴 어게인>이 그런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인생의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중년 프로듀서와 남자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이별의 슬픔에 잠긴 아마추어 가수가 우연히 만나 길거리에서 음악을 녹음하며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음악영화인 만큼 OST도 훌륭하다. 여주인공 키이라 나이틀리가 부른 <A Step You Can't Take Back>과 <Lost Stars>는 지금도 운전하면서 종종 듣는다. 극 중 그녀의 남자 친구인 진짜 가수(마룬 5의 애덤 리바인)가 부를 때보다 가창력이 떨어질지 몰라도, 키이라 나이틀리 특유의 담백하고 차분한 음색이 담긴 노래는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2014년 8월에 국내 개봉된 존 카니 감독의 <비긴 어게인>은 놀랍게도 한국에서 가장 큰 수익과 인기를 얻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살면서 듣게 되는, 가장 기분 좋은 말이다. 자신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하고, 삶에 지친 동료에게 전하는 진심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100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달리기 경주가 아니다. 물론 하루하루를 그런 강인한 정신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운동과 숙면, 충분한 영양보충이 뒷받침될 수만 있다면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매일 아침은 새로운 시작이다. 전날 무리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든, 후회막심할 정도로 한심하게 보냈든, 오늘은 모든 것이 리셋된다. 정신 차리고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좀 더 여유로운 마음과 긴 안목을 가진 사람에게, 인생은 장애물 가득한 마라톤 경기로 다가온다. 삶의 진정한 가치는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달리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실제 마라톤 경기에는 페이스 메이커가 함께 달리며 도움을 주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내 삶의 속도가 저속인지 과속인지, 끝까지 정신줄 놓지 않고 완주할 수 있을지 조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인 선택은 나의 몫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장애물과 맞닥트렸을 때의 대처방식이다. 진흙탕 정도의 가벼운 난관에서부터 천 길 낭떠러지 같은 절체절명의 고비까지 우리 인생길에는 수많은 장애와 위기가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긴 호흡을 하곤 했다. 더디더라도 충분하게 마음의 준비를 한 후에야 추스르고 일어났다. 그런 나에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빠르게 회복하는 사람들은 그저 선망의 대상일 따름이다.
결국 관건은 얼마나 멘탈을 건강하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위기를 쉽게 극복하고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는, 말 그대로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들은 인생을 긍정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굳은 믿음 역시 필요하다. 나의 소중한 정체성을 흔들림 없이 지켜나갈 수만 있다면,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후회 없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비긴 어게인>에 등장하는 천재 프로듀서 댄 멀리건(마크 러팔로)은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와 별거하며 술에 취해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중에 영합하는 상업주의 음악을 추구하는 것보다 원석을 발굴하여 음악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진정한 프로듀싱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신이 만든 레이블 음반회사의 비즈니스 전략과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세속적인 성공과 실리를 택하기보다 자신만의 음악적인 취향과 프로듀싱 능력을 신뢰하는 댄은 한동안 좌절과 실의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단골 바에서 우연히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의 노래를 듣게 되고,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다시 불타오르게 된다. 자존감을 굳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운명 같은 계기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인생은 마법처럼 다시 시작된다.
내 마음의 보석상자 같은 TV 프로그램이 있다. 영화와 제목이 동일한 JTBC의 <비긴 어게인>이 바로 그것이다. 2017년 6월에 첫 방송된 이 작품은 매년 시즌제로 방송되면서 음악과 여행을 사랑하는 시청자들에게 힐링의 순간을 선사했다. "낯선 곳에서 다시 노래하다", "거리의 소음마저 음악이 되는 순간" 등의 소개 문구가 상징하듯이, 유럽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한국의 유명 뮤지션들이 팀을 이루어 버스킹 공연을 진행한다.
<비긴 어게인> 시즌1의 첫 여행지가 영화 <원스>의 배경이 되는 아일랜드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원스>는 제80회 아카데미 주제가상(Falling Slowly)을 받을 정도로 웰메이드 음악영화다. 버스킹 공연을 소재로 음악과 사랑을 필름에 담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명작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버스킹 방식의 <비긴 어게인>이 아일랜드에서 처음 공연을 시작했다고 사람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중요한 만남의 인연이 담겨있다. <원스>를 연출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린 존 카니 감독의 다음 히트작이 바로 영화 <비긴 어게인>이었던 것이다. TV 프로그램 <비긴 어게인>은 이렇게 영화 <비긴 어게인>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여러 시즌을 거치며 다양한 가수와 연주자들이 등장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비긴 어게인>의 대표 아티스트는 박정현과 하림, 수현과 헨리다. 각자의 사연을 지닌 그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잔잔한 감동을 함께 할 수 있었다.
JTBC <비긴 어게인> 시즌 3에서 박정현이 혼신을 다해 부른 "샹들리에"는 말 그대로 레전드 무대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최고의 자리에 등극한 후 이제 자신을 되돌아보고 초심으로 돌아가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되찾고자 한 박정현이 <Someone Like You>와 <Chandlelier>를 부르는 모습은 유튜브에서 수백만 뷰를 기록할 정도로 감동을 선사했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떠돌다가 드디어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린 하림과 군 입대한 오빠로 인해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수현에게도, <비긴 어게인>을 통해 함께 여행하고 버스킹 한 추억은 '새로운 출발'로 기억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빛나는 성취를 이루면서 황금빛 인생을 구가하다가 어느덧 세월이 지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다시' 시작한다는 것 자체로도 너무나 값진 선택이다. <멜로가 체질>의 주인공들처럼 실연과 사별, 이혼 등 저마다의 아픈 상처를 극복하고 씩씩하게 세상과 부딪혀 나가는 20대 청춘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크고 작은 아픔과 좌절을 겪으며 휘청거린다. 그렇다고 그냥 힘없이 주저앉아 버리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힘껏 외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