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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Aug 16. 2021

이상과 동주, 작가의 길을 묻다

파격적인 천재성과 공감하는 감수성 사이 어딘가 존재하는 창작의 본질

나는 크리에이터라는 말을 좋아한다. 카카오 브런치에서 나를 소개하는 문구 역시 '크리에이터'라는 간결한 단어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것과는 뭔가 다른, 나만의 'something new'가 담긴 작품을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의 뛰어난 컬처 크리에이터들을 찾아서 그들의 불꽃같은 콘텐츠를 감상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천재적인 예술가와 창작의 본질에 대해 강렬한 문제제기를 했던,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묵직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무례하고 괴팍하지만 천재성을 타고난 음악 신동 모차르트와 아무리 노력해도 그를 따라잡을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며 결국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살리에리.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인 선천척 재능과 후천적 노력 사이에서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은 번뇌의 밤을 지새우고 있다.


제57회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한 <아마데우스>의 남우주연상은 정작 모차르트 역의 톰 헐스가 아니라 살리에리 역의 F. 머레이 에이브러햄에게 돌아갔다.


대학 시절에는 극단 워크숍 단원으로 연기 연습을 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연극 연출가를 꿈꿨고, 취직 준비를 하면서 다큐멘터리 PD가 되어 논픽션의 위대함을 만들고자 했던 나는, 지금 작가가 되어 고독한 크리에이터의 길을 걷고 있다. 연극 무대와 촬영 현장이 아닌 나만의 작업실에서 노트북과 인터넷을 벗 삼아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나는 주로 가벼운 에세이와 인사이트 담긴 시사칼럼을 작성하며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독자와의 교감을 시도해왔다. 우리 집 강아지를 소재로 한 <몰타에 간 말티즈>와 유럽 이야기 <비엔나 프로젝트>, 새로운 미래를 진단한 <느닷없고 소소한 나의 21세기>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운문으로 창작 영역을 확대하여, 시를 통해 주위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내게 운명처럼 다가온 젊은 천재 시인 2명이 있었으니, 이상과 윤동주가 바로 그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상과 윤동주는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단 하루도 한국인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본명이 김해경인 천재 시인 이상은 우리가 일본에 강점당한 1910년에 태어나 1937년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1917년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일제가 패망한 1945년 2월에 끝내 민족 해방을 못 보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채 피지도 못한 청춘을 마감했다.


무시와 좌절, 억압과 투옥 속에서 20대 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이 두 청년은, 동료와 후학이 정성스럽게 엮은 작품집이 사후에 발간되면서 마침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비록 시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작가정신도, 후대의 해석과 평가도 완전히 결을 달리 하지만, 이 두 위대한 창작자가 남긴 경이롭고 뜨거운 작품을 감상하며 오늘도 나는 한 편의 시가 선사하는 충격과 감동을 되새기곤 한다.


무엇보다도 창작의 본질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상과 윤동주는 극적인 비교대상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의식의 흐름을 따라 번뜩이는 찰나의 영감을 휘갈기는 것일까, 무수한 퇴고와 되새김질을 통해 정제되고 응축된 생각을 전달하는 것일까? 아무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파격성과 실험성이 우선인가, 다수가 공감할 만한 진솔함과 보편성이 중요한가?


불우한 어린 시절과 건축학 전공자의 지식이 응축된 이상의 작품은 이른바 '시'의 정체성에 도전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반복과 생략, 의도적인 어법 파괴와 해체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시로 표현했다. 쉽게 이해할 수 없기에 다양한 해석이 난무했고, 오독과 폄하도 종종 발생했다. '박제된 천재' 이상의 연작시들은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했지만, 그의 작품에 담긴 초현실주의 미학과 그로테스크한 표현은 시대를 뛰어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따뜻한 감수성을 지닌 식민지 문학도 윤동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고뇌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수채화처럼 표현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단어로 간결하게 표현하면서, '시'가 지닌 아름다움을 모두가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되, 언제나 스스로를 참회하고 성찰하는 마음을 담았기에 지금도 그의 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연수 작가의 <꾿빠이, 이상>과 이준익 감독의 <동주>. 백여 년이 흐른 2016년, 이상과 윤동주는 소설과 영화로 다시 한번 우리 곁에 찾아왔다.


이상과 윤동주는 위대한 시인이자 그 자체로 흥미로운 창작대상이기도 하다. '문제적 인간' 이상의 생애와 작품을 치밀한 고증을 통한 추리소설 기법으로 긴장감 넘치게 묘사한 <꾿빠이, 이상>은 작가 김연수의 역작이자 존경 어린 헌사이기도 하다. 이준익 감독의 작품 <동주>에는 청년 윤동주의 싱그러운 기백, 송몽규와 함께 참여한 조선독립의 애환이 담겨있다. 담백한 흑백 필름 속에 묘사된 동주의 짧은 일대기를 관람하며 내 마음은 아련하게 저려왔다.




아무리 차이가 크게 느껴져도 이상과 동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문학 천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어찌 보면 그 반대편에 존재하고 있는, 모차르트가 아닌 살리에리로 분류되는 두 명의 중후한 소설가에게서 나는 희망과 위안을 얻는다. 40대에 문단 데뷔했지만, 이후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작품세계를 펼친 중년의 작가 박완서와 김훈이 바로 그들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 6.25 전쟁과 남북 분단 그리고 가부장적 유교문화와 근대화 등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살아온 박완서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백하게 소설에 담았다. 1970년 소설 <나목>으로 존재를 알린 그녀는 40대 전업주부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이후 40년 동안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어설픈 선악 구분 없이 중산층의 위선을 위트 있게 드러내고 노년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박완서의 작품들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김훈의 <칼의 노래>. <칼의 노래> 표지 하단의 추천사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박완서다. 역시 고수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밥벌이의 지겨움'과 같던 오랜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4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선택한 김훈은 2001년 발표한 <칼의 노래>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탄탄한 문장과 깊이 있는 해석을 갖춘 그의 역사 소재 소설들은 출간될 때마다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자전거 여행>이나 <라면을 끓이며> 같은 산문집을 읽노라면, 김훈 특유의 벼리고 벼린 문장과 세심하게 선택된 단어들을 음미할 수 있다.


박완서와 김훈은 '글쓰기'라는 창작행위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강해지고 그윽해질 수 있음을 입증했다. 비록 번득이는 재기와 송곳 같은 천재성을 발견하긴 어렵지만, 세월의 더깨가 소복이 쌓인 그들의 글에는 삶의 모순과 고된 하루살이가 자연스럽게 담겨있다. 기본적으로 책은 독자에게 공감과 여백의 시간을 선사한다. 박완서와 김훈의 글을 통해 우리는 함께 느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다.




지금부터는 내 이야기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크리에이터이자 작가인 나는 주제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일이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 짧던 길던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한 마라토너처럼 온몸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내야만 한다. 물론 두렵고 힘든 만큼, 과정의 즐거움과 결과의 성취감 역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다.


굳이 선택하라면, 나에게 작가의 길은 이상보다는 윤동주에게, 이상과 동주보다는 박완서와 김훈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다. 파격적인 천재성보다는 교감하는 성실성을, 질주하는 청춘의 패기보다는 오랜 시간 우려낸 중년의 숙성을 선호한다. 작품을 매개로 하여 나와 독자가 진심으로 교감하고, 그들의 인생에 잠시 쉼표를 안겨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창작물의 가치를 감별하고 평가하는 나만의 소믈리에 원칙은 익숙한 흥행공식이나 작품 구성의 정형성으로부터 얼마나 탈피했느냐 여부다. 카메라 앵글 하나만 바꾸어도 전혀 다른 느낌을 전달할 수 있듯이, 어떤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는 천양지차로 벌어진다. 제목으로 어그로 한다든지, 감동을 억지로 쥐어짠다든지 하는 전략은 이내 외면받기 십상이다.


내가 즐겨 쓰는 칼럼이나 에세이 같은 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얼마나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을 제시했는지에 달려 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나 새로울 게 전혀 없는 글을 포장만 예쁘게 해서 출간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참신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관점을 구비하기 위해서는 기존 자료들에 대한 꼼꼼한 검토가 필수다. 인정받는 크리에이터가 되려면 그에 앞서 성실한 에디터가 되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정치가나 기업가가 아닌 작가가 가장 존경받고 대우받는 그런 사회다. 이를 위해 작가는 세파에 찌든 시민들에게 위안과 감동을 주는 스토리텔러여야 한다. 갈등의 해법을 제시하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시대의 현자여야 한다. 묵묵히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단지 자기만족을 뛰어넘어 타인과 공감하며 바람직한 지향점을 제시하기 위해 오늘도 부단히 수련과 습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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