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안개 자욱한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처럼, 도무지 앞이 안 보이고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두려움마저 일던 시절이 있다. 나에게는 대학 졸업을 앞둔 20대 중반이 그러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떠밀리듯이 세상에 나가 무엇이든 해야만 했던 그 시절의 당혹감.
겨우 힘든 고비를 넘기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안정된 일상을 영위하던 50대 초반, 나는 두 번째 물안개를 만났다. 전문 연구자로서 자기 이름을 걸고 결과물을 발표하던 시절이 마감되고, 관리책임자가 되어 정무적인 판단과 소모적인 행정 업무에 시간을 뺏기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인생을 길게 보고 호흡을 가다듬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는 아팠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목표를 정하지도 못했다. 체력은 점차 저하되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격무에 시달리는 것도 아닌데, 집에 오면 소파에 파묻혀 TV만 보고 그저 출퇴근만 반복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반전의 계기가 필요했다.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다.
간절히 기다리던 첫 번째 깨우침은 책에서 나왔다. 아들 공부방 서재에 꽂힌 책들을 보다가 우연히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걷는 사람, 하정우>. 잘 나가는 영화배우의 명성을 빌려 가볍게 쓰인 에세이려니 생각하고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다. 한 달에 최소 4~5권씩 온라인 주문해서 다양한 교양서적을 탐독하는 나로서는 아들의 독서 취향이 가볍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걷기에 거의 중독상태인 하정우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묘하게 그의 스토리에 점점 끌려들어 갔다. 인생의 길잡이를 해주겠다며 온갖 좋은 글로 도배를 한 자기 계발서들보다 오히려 감동적이었다.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하정우가 친 공이 나에게는 홈런이 되었다. 나는 하정우가 차고 다니는 핏빗 스마트워치를 바로 주문했다.
돌이켜보면 몸을 잘 관리하고 특히 허리와 하체를 강화해야겠다는 다짐을 수시로 했었다. 주위에 민폐를 끼칠 정도로 혼자 못 걷고 힘들어하던 창피한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항상 그때뿐이었다. 절박한 동기부여가 없었고, 당장 실행에 옮기려는 결단력도 부족했다. 이대로는 안 되는데 하며 우물쭈물하던 나에게 하정우가 쓴 걷기 에세이와 핏빗 스마트워치는 마침내 임계점을 돌파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걷는 사람, 하정우> 책 표지(좌)와 내가 구입해서 착용하고 다니는 Fitbit Versa 2(우)
지금도 핏빗 와치를 처음 차던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2019년 11월 15일. 그날은 1박 2일로 부산 출장을 가는 날이었다. 웬만하면 꾸역꾸역 기다리며 에스컬레이터를 타던 나는 계단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목표는 하루 1만 보, 8킬로미터 이상. 둘째 날이 되자 발이 아파왔다. 생전 그렇게 열심히 걸은 적이 없으니, 매일 신고 다니던 랜드로버 착용감이 그리 편하지 않은 줄도 몰랐던 것이다.
신세계 센텀시티에 있는 나이키 매장에서 맘에 드는 운동화를 골라 신었다. 세상에나, 날아갈듯한 착용감이 느껴졌다. 아들에게는 항상 나이키 신상을 사주면서 정작 나는 아무거나 대충 신고 다녔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정장에 구두를 신는 날도 제법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진 걷기 전용 운동화 예찬론자가 되었다. 아무리 비싸도 운동화만큼은 신중하게 최고의 제품을 선택했다.
이제 나의 걷기 인생은 거의 2년이 되어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는 하루 목표량을 항상 완수했다. 막연히 걷는 것보다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를 보면서 수시로 확인할 수 있으니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그사이 뱃살은 눈에 띄게 들어갔고, 다리 근육은 탱탱해졌다. 얼마 전 핏빗에서 메시지가 왔다. 2021년 5월 2일 현재 내가 통산 4800킬로미터를 걸었다는 것이다. 이 거리는 대서양에서 홍해로 펼쳐진 사하라 사막의 길이와 같다고 한다.
자신의 뜻과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도구를 활용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말과 글이다. 팬터마임처럼 몸짓으로도 가능하다.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작품으로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자신의 사상을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능수능란한 달변가와는 거리가 멀고 몸치이며 예체능에 별다른 소질이 없는 나에게는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만이 거의 유일하면서도 효과적인 소통수단인 셈이다.
비록 지금은 게으름을 피우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만 언젠가 마치 운명처럼 내 곁으로 다가올 것 같은 존재가 있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그랬다. 당장 전업작가로 살아갈 만큼의 재능과 용기는 없었지만, 항상 좋은 글을 읽고 생각나는 것을 끄적이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내가 카카오 브런치와 만난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우연이라고 볼 수 없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반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2020년 한 해 동안 비엔나에서 지냈다. 비엔나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근무하게 된 아내 덕분에, 나는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1년 동안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소중한 그 시간 동안, 나는 미리 구상한 유럽의 도시공원 관련 책을 쓰고 유튜브 영상을 제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팬데믹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나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속절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예전에 언뜻 보았던 브런치가 떠올랐다. 막연하게 멋진 책을 써야지 생각만 하고 전혀 진전이 없던 나에게 브런치 글쓰기는, 핏빗 스마트 워치가 그랬던 것처럼, 꾸준히 성과가 축적되어 어느 순간 놀라운 결과물이 완성되는 최고의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듯이, 매일 조금씩 자료를 찾고 초고를 쓰고 퇴고를 거듭하는 가운데 나의 글 근육은 점차 단련되었다.
브런치 북으로 발간한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와 에디터 추천 글로 실린 "좋은 아빠 자격시험, 함께 보실래요?"
2020년 6월에 처음 글을 올렸으니 이제 1년이 훌쩍 지났다. 1년 동안 80편 정도의 글을 지속적으로 작성할 수 있는 데에는 어느덧 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걷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글의 주제가 떠오르지 않을 때,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좋은 문장이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나는 책상 앞에서 고민하기보다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었지만, 계속 걷다 보면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아이디어가 불쑥 떠올랐다. 집중해서 글을 쓰기 위한 체력을 길러준 것은 당연한 덤이기도 했다.
일상 속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은 루틴을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변화를 시도하기도 힘들고 언제든 원위치로 후퇴하기 쉽다. 예전에 하루에 한 갑 이상 피우던 담배를 끊을 때의 정말 힘들었던 과정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걷기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시작은 했지만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다. 어느덧 6개월이 흐르고 1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하체와 코어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 시작한 걷기는 나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장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쾌변이 가능해진 것이다. 어려서 장중첩증 때문에 큰 수술을 해야 했던 나는 그 이후 소화기능이 약해져서 배변이 썩 원활하지 못했다. 걷기를 시작한 지 3개월 정도가 지나자 눈에 띌 만큼 상태가 호전되더니 지금은 항상 정해진 시간에 쾌변을 하고 가뿐한 상태로 하루를 보낸다.
걷기는 글쓰기 작업에서도 가장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맡고 있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걷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순간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고민들이 서서히 풀어지면서 해결책이 찾아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한때 술 먹고 담배 피우며 고민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가장 미련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 당시에 나의 뇌신경세포와 시냅스가 겪었을 시련과 고초를 생각하면 아찔한 마음이다.
꾸준히 걸으면서 개선되기 시작한 나의 일상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카카오 브런치와 만난 나의 글쓰기는, 지난 시절 조금씩 숙성하며 축적해온 재능과 연결되어 물 만난 고기처럼 활짝 피어오르고 있다. 걷기가 가져다준 심신의 변화는 좋을 글을 쓸 수 있는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만보쾌변 청뇌일사 萬步快便 淸腦一思'라고 부를 만하다.
지금 나는 한국에 돌아와 매일 내공을 쌓으며 자기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 홀로 걸어가는 이 길이 외롭지 않은 이유는 걷기와 글쓰기라는 멋진 친구들이 언제나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