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청명한 주말 아침, 나는 해남 땅끝마을에 도착했다. 1시간 간격으로 노화도로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서다. 뱃머리 난간에 몸을 기대고 넘실대는 남해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든 같은 바다이건만, 동해와 서해 그리고 남해는 왠지 느낌이 다르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수평선 아래 남해 바다는 화려하면서도 처연한 모습으로 거대한 몸을 뒤척거리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보길도다. 남해의 수많은 섬 중에서 굳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고산 윤선도의 거처를 둘러보며 그가 남긴 족적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보길도만의 자연 풍광을 감상하며 홀로 천천히 트래킹하는 것도 여행 미션 중 하나다. 여기에 덧붙여, 시원한 바다내음으로 힐링하고 섬 특산물인 전복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도 가외의 즐거움이다.
동해가 깊고 무거우며 서해가 가볍고 날렵하다면, 남해는 화려하되 처연한 모습으로 우리를 지키고 있다
1637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윤선도는 치욕스러운 이 땅에서 사느니 차라리 바다 건너 탐라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풍랑이 심해 보길도에 잠시 머물다가 이 섬의 산세와 지형에 매료되어 아예 정착하게 된다.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 훗날 윤선도는 보길도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로부터 400여 년이 지난 2021년 9월, 나는 보길도에 도착했다. 과연 무엇이 나를 여기에 머물게 할까?
땅끝마을 갈두항에서 30분 정도 배를 타고 가면 노화도 산양 선착장에 도착한다. 이제부터는 배로 운반한 차를 타고 노화도와 보길도를 연결한 보길대교를 건너가면 된다. 섬 초입에 있는 식당에서 전복죽과 찌게로 맛있게 식사를 했다. 전복은 8월에서 10월이 제철이고 완도산을 최고로 친다. 말하자면 나는, 1년 중 가장 먹기 좋은 시기에 가장 좋은 품질로 인정받는 원산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전복을 마음껏 먹은 셈이다.
보길도에는 해안을 따라 섬을 일주하는 도로가 없다. 따라서 드라이빙과 트래킹을 적당히 안배해야만 섬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나는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운전해서 보길도 남단의 보옥리 공룡알 해변을 가장 먼저 찾았다. 크고 둥글둥글한 청명석 갯돌이 해변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두고 공룡알이라 부른 것은 참신했지만, 조금 더 즐기고 감상할만한 식당과 카페, 관광시설은 발견할 수 없었다.
공룡알 해변에서 느낀 아쉬움은 어부사시사 명상길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좋게 생각하면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보존한 상태이지만,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관광객에게는 명상은커녕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드는 험한 등반로였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적절한 관리와 사람과의 조화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신비스러운 스토리텔링이 덧붙여졌을 때, 그곳은 누구나 가보고 싶은 명소가 된다.
보옥리 공룡알 해변에는 말 그대로 공룡알처럼 생긴 갯돌이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예송리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회복한 나는 보길도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방문했다. 소금기 머금은 해풍과 운무가 서리는 보길도의 중심부에 들어서면, 동백 숲이 무성하고 연꽃 봉오리가 피어나는 것 같은 지형을 갖춘 윤선도 원림이 모습을 드러낸다. 격자봉 아래 낙서재와 맞은편 산 중턱의 동천석실 그리고 연회를 베풀고 풍류를 즐기던 세연정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낙서재 툇마루에 앉아 윤선도가 지은 <오우가>를 음미했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동산에 달(月) 떠오르니 그 모습 더욱 반갑구나/두어라 이 다섯 외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파란만장한 인생의 끝자락을 보길도에서 보내면서, 과연 고산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자연을 벗하며 속세와의 인연에서 훌훌 벗어났을까 아니면 당파싸움과 예송논쟁의 희생양이 된 자신의 처지를 마냥 한탄했을까?
낙서재와 곡우당, 동천석실과 부용동 원림을 차례차례 감상하며 나는 보길도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풍수지리를 활용한 서재와 자연과 조화된 정원이 지닌 아름다움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하지만 육지로부터 한참 떨어진 이 섬에서 이처럼 유려한 건축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비들의 힘든 노동이 있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썩 편치는 않았다.
고산이 글 읽는 즐거움을 만끽한 <낙서재>와 맞은편 산 중턱에 연못과 한 칸짜리 집으로 마련한 <동천석실>
서서히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보길대교를 지나 다시 노화도로 이동했다. 갈대와 꽃과 섬을 뜻하는 한자가 조합되어 만들어진 노화도에는 섬 곳곳에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땅끝마을로 돌아오는 뱃길 너머로 보길도가 아스라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육지와 단절된 채 망망대해의 섬 생활을 택한 고산의 처연한 마음을 전해주듯이 어느새 흐려진 하늘에서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기 시작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의 명언처럼,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은 현재의 시각에서 부단히 재조명된다. 바로 이 점에서, 고산 윤선도에 대한 평가 역시 보다 입체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 동시대를 살아간 동양과 서양의 거장들을 함께 비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587년(선조 20년)에 태어나 1671년 85세의 나이로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한 윤선도는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효종과 현종의 사부 역할을 했다. 제자였던 세자가 연이어 왕위에 올랐건만, 정작 고산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서인 세력과 맞서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세 차례에 걸쳐 15년 동안 유배되었다. 고산의 죽음을 애통히 여긴 숙종이 의정으로 사후 예우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반대에 부딪혀 결국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윤선도가 살았던 조선 중기의 이른바 양반 계급은 성리학 기반의 백면서생 유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고산은 뛰어난성리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자 의학자였으며, 풍수지리와 조경에도 조예가 깊은 그야말로 다방면의 재능을 지닌 선비였다. 문과와 이과로 구분된 학제를 통합하여 이른바 '융합형 인재상'을 추구하는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윤선도야말로 시대를 앞서 나간 조선의 큰 인물이었던 셈이다.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만든 다재다능한 천재로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꼽곤 한다. 고산보다 135년 일찍 태어난 그는 회화와 조각, 과학, 해부학, 수학 등 여러 분야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다만 둘 사이에는 시대와 배경의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고산이 봉건왕조 시대의 고루한 당파싸움 속에서 죄인처럼 유배당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레오나르도는 르네상스가 꽃피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자신의 재능을 활짝 펼칠 수 있었다.
사실 기원전 6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 철학가, 소피스트와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백가쟁명 사상가들의 지적 수준과 토론 기술은 가히 막상막하였다. 이후 100여 년 가까이 활발하게 전개된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은 후대를 위한 소중한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다. 15세기 이후 휴머니즘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선도하면서 서양의 학문과 예술 수준이 크게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 체제의 낙후와 기술 발전의 지체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뛰어난 사상가들 역시 계속 존재해왔다.
기원전 서양 철학의 기반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마련했다면, 동시대에 동양에서는 공자와 맹자가 왕도정치와 민본주의의 핵심 사상을 완성했다. 15~16세기 동서양 사회운영 시스템의 격차를 상징하는 인물이 윤선도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면, 18~19세기에는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이마누엘 칸트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경쟁하듯이 동서양 철학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모든 것이 바뀌고 인터넷으로 동서고금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금,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그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본다. 그리고 보길도를 홀로 여행하며 느꼈던 고산 윤선도의 마지막 여정을 상상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새삼 하게 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