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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Nov 12. 2020

20세기 소년, 21세기 소녀를 만나다

지난 세기의 추억을 안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조망하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은 나에게 만화의 위대함을 선사한 경이로운 작품이다. 1999년에 연재를 시작하여 2007년 완결된 이 장편만화의 상징적인 대사는 다음과 같다. "그들이 없으면 21세기를 맞이할 수 없었겠죠. 소개합니다. 20세기 소년입니다!"     


그렇다. 나 역시 20세기 소년이다. 만화의 주인공인 엔도 켄지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니며 21세기에 펼쳐질 빛나는 미래를 꿈꿨다. 21세기의 진정한 주인공인 나는 행여 악의 무리들이 도발한다면 언제든 한방에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20세기 소년> 만화표지와 주요 등장인물


하지만 만화와 현실은 달랐다. 20세기 소년인 나에게 새로운 밀레니엄은 여전히 낯설고 두렵다. "새 시대의 첫차가 되고 싶었는데, 구 시대의 막차가 되고 말았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식은 나를 비롯해 어느덧 중년이 된 한국의 20세기 소년들에게 무거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21세기가 시작된지도 벌써 20년이 흘렀다. 20세기 소년에게 2020년은 어린 시절 탐독했던 공상과학 만화의 시대 배경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고 3D 홀로그램으로 원격회의를 하는 2020년은 당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였다.


우리 곁에 다가온 21세기는 지난 세기와 확연히 다르다.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이뤄낸 스마트 디지털 환경은 사람들의 일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과 자연과의 조화라는 글로벌 어젠다의 등장은 인류의 성숙함을 증명한다.  


구글과 유튜브, 페이스북과 아마존이 제공하는 온라인 신세계는 21세기 인류에게 축복을 안겨주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리적 한계는 20세기의 유물로 쓸쓸히 남겨졌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지식정보와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검색하고 즐길 수 있다.


21세기 인류는 다양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다름에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한다. 중국의 한 도시에서 발생한 호흡기 질환이 전 세계를 공포와 절망에 빠뜨릴 만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천재적인 금융 사기꾼들이 실물 경제와 무관하게 펀드 수익으로 거액을 챙기고 나면 각국 정부는 국민 세금으로 손실을 메꾸기 바쁘다.


똘레랑스와 배타주의의 교차 속에서 21세기 인류는 산업혁명 초기 증기기차처럼 덜커덩거리며 힘들게 전진하고 있다. 인터넷의 익명성을 이용한 악성 댓글과 SNS를 통해 유포되는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있는 2020년을 바라보노라면, 우리 사회가 과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누군가는 우리 사회가 변화하는 느린 속도에 망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지향하는 좌표 자체에 반대하기도 한다. 이럴 때일수록 함께 머리를 맞대고 소통을 해야 하건만, 1인 미디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굳이 다른 의견에 불편해하기보다 유유상종의 폐쇄적 동질감에 만족해한다.


희망과 좌절이 뒤섞이고 낙관과 비관이 공존하는 21세기의 첫 20년을 살아온 20세기 소년의 마음에도 기대와 착잡함이 늘 함께 한다. 태생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한계를 우려하면서도 집단지성을 통한 치유와 배려의 문화가 있기에 안도한다. 어찌 되었든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진전된 내일을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세기 소년>을 통해 우라사와 나오키가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한다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 큰 불행을 안겨준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켄지가 '친구'의 이름을 불러주고 "너, 그 가면 벗어라"라고 말하는 순간, 그들은 화해의 실마리를 힘들게 찾는다.


20세기에 태어난 소년들이 느닷없이 다가온 21세기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새로운 밀레니엄에 태어난 21세기 소녀들은 강한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무장한 채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2016년 BTS가 발표한 <21세기 소녀>의 가사처럼. "21세기 소녀들아, 말해 너는 강하다고, 말해 너는 충분하다고"


방탄소년단이 2016년 10월 발표한  <21세기 소녀>

   

생각해보니 <20세기 소년>의 또 다른 주인공인 켄지의 조카 칸나 역시 에너지 넘치고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21세기 소녀의 상징이었다. 켄지 삼촌의 억울한 누명을 벗어내고, 막강한 '친구' 세력과 맞서 싸우는 칸나의 활약은 <20세기 소년>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21세기에 대거 등장한 알파걸들은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는 남성들과 맞서 싸우며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남성 중심 문화 속에서 20세기 중반에야 겨우 참정권이 주어진 20세기 소녀의 후예들은 불과 몇 세대 지나지 않아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글로벌 리더로 성장했다.


이제 20세기 소년으로 총칭되는 40대 이상의 아날로그 이성을 갖춘 기성세대와, 21세기 소녀로 상징되는 30대 이하 디지털 감성의 밀레니얼 세대는 혼돈으로 가득 찬 21세기를 함께 헤쳐나가야 한다. 때로는 격하게 충돌하고 대립하며, 때로는 인생 선후배로 배우고 협력하며 새로운 세기를 만들어간다. 


20세기 소년이 21세기 소녀와 만나고 부딪히는 다양한 모습 속에서, 이를 에워싼 21세기의 풍경은 오늘도 다채롭게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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