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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핍의 임상심리사 Mar 15. 2024

전세사기를 당한 임상심리사

드디어 글을 쓸 날이 되었다. 지난 9월에 시작된 이 고통은 올 3월이 되어 끝을 보았다.

고대하던 내집 마련. 아파트 매매 계약을 하고 돌아와 행복감에 젖었던 그 날,

전셋집 임대인과 통화하면서 무언가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있었다.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다.



저 여자 첫 인상이 안 좋았지.


당시 병원을 급히 옮기면서, 거주할 곳도 급히 알아보았다.

병원에서 걸어갈 수 있는 작은 오피스텔이었는데, 전세 계약을 하던 날, 젊은 편에 속하는 임대인이 부동산에 나타났다.


반쯤 풀린 눈에 혓바닥도 반토막이 났는지 부정확한 발음으로 애기 같이 말하던 그녀.

담배 냄새가 지독했다.


"알콜릭 같은데." 나는 직업병이 도져 속으로 중얼거렸다.


임대인이 잠시 부동산을 나갔을 때 부동산 사장님께 물어봤다.

"저 사람 좀 이상한데요?"

부동산 사장님 왈 "돈이 많아서 그래요. 이 건물 시행사 딸이에요."


부모 돈으로 임대 사업을 하며 놀고 먹는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녀는 실제 임대인은 아니었다. 임대인의 딸이었다.

나이가 많아 부동산에 직접 올 수 없다는 임대인 부부의 자녀임을 확인하는 서류와

갑구, 을구가 깨끗한 등기부등본을 받아보고

나는 어쨌든 이 동네에서 가장 깨끗한 신축 오피스텔이자, 병원에서 아주 가까운 이 집에 살아야겠다고 결정했다.


어찌 그리 겁이 없었는지.



그녀는 사기꾼은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사기꾼은 아니었다. 그냥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딸로, 부동산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의지도 없는 무능한 여자였다.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이사를 나가겠다고 통화하던 그날, (다행히 그녀의 혓바닥은 반토막이 아니었다. 매일 술을 먹는 건 아닌가보다) 그녀는 다음 임차인을 직접 구하고 나가달라고 했다.

계약 종료일은 12월이었기에 나는 일단 그러겠다고 했다. 내가 계약보다 일찍 나가는 거니까.


문제는 집의 가격이었다.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집 값이 뚝뚝 떨어지던 그 시점에,

그녀는 전세금을 내릴 생각이 없었다.

알고보니 그녀는 이 건물에만 30개가 넘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대출을 돌리고 돌리고 막고 막고. 그러고 살고 있었다.

하나라도 전세금을 내리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영끌을 한 것이다.


계약서에 있는 임대인의 집주소 등기부등본을 떼어 보니 평창동의 비싼 주택을 얼마전 경매로 넘긴 기록이 있었다. 임대인도, 임대인의 딸도 더 이상 그곳에 살고 있지 않았다.

임대인은 돈이 한 푼도 없는 거 같았다.

아찔해졌다.  



임상심리사라면 전세 사기 정도는 극복해봐야지.


아무래도 저 여자가 제때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할 거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끝내 그랬다.

알아보니 형편이 안되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것도 전세 사기에 포함된다고 한다.

오, 내가 그 유명한 전세 사기에 당한거야. 지금.

다행히 나는 전세금에 대해 100% 전세 보증 보험을 들어 놓았지만,

매일매일 뉴스에서는 전세 보증을 들어놓았지만 보증금을 받지 못한 사례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6개월 가량 안전히 보증금을 돌려 받을 수 있을지 초조해하며 지옥의 날들을 보냈다.

그래, 그 알량한 전문가 임상심리사는 어떻게 고통을 감내했을까.

그 얘기나 써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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