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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너하리 May 17. 2024

#30. 선생님은 왜 정신과의사가 된 거예요?

정신과의사의 일기

#30. 선생님은 왜 정신과의사가 된 거예요?

방황하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그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통해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무렵에는 예쁜 그림이 들어간 심리에세이 서적들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어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백세희 작가님이 쓰신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됐는데, 자신이 경험한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걸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답니다. 상담을 진행하는 정신건강의학과 담당의 선생님과의 대담이 있는 그대로 실려있어서 더 흥미로웠던 기억도 나네요. 나도 저런 의사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글재주가 뛰어나서 좋은 글을 척척 써 내려가고 멋진 책을 만들어내는 타고난 작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내가 배워갈 인생을 꾹꾹 눌러 담아 그려낼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겠다는 작은 바람. 대단하고 특별한 영화 같은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긴 뜬구름 같던 꿈은 점점 짙어졌고 어느새 3년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저는 정신과의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꿈이 흐려질 때면 몇 번이고 그림을 그려온 날들. 정신과의사가 되기만 한다면 모든 것들이 다 잘 될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입은 가운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다는 걸 금방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제 앞에 선 환자들의 인생, 그들과 가족들의 눈물이 쌓여가며 점점 무거워지더군요. 나 잘하고 있는 거죠? 이렇게 하면 언젠가는 잘할 수 있겠죠? 불안한 마음에 허공에 대고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던지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바쁜 일상에 중요한 것들을 하나씩 놓아가며, 어느새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던 그림과도 잠시 멀어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한 환자가 제게 물었습니다. 혹시, 선생님은 왜 정신과의사가 된 거예요? 분명, 정신과의사가 되기 전에는 대본처럼 대답하던 질문이었어요. 하지만, 그날은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오래도록 그리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니면, 정신과의사로서도,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도 자신이 없어서였을까요?

그렇게 집에 돌아와 다시 펜을 꺼내 집어 들었습니다. 누군가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나를 살아가게 해 준 그림을 통해, 용기와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길 바라며. #정신과의사의 일기. 서툴게 그린 그림처럼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저는 이 일이 참 좋습니다. 정신과의사로서도, 작가로서도 당신들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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