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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Mar 21. 2024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왜 고통이 있나요?

세상에 고난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

얼마 전 구독자 한분께서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 주셨는데

좋은 질문이라 생각되어 몇 자 적어봅니다


참고로 제가 생각하는 좋은 질문이란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을 말합니다


사실 죄라든가 믿음, 기도, 복음, 구원과 같은 단어는

매우 평범해 보이고 누구나 그 뜻을 다 아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정확한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안다 해도 이를 온전히 설명해 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의 핵심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고난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고난이나 고통의 의미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유는 아마도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왜 고난과 고통이 존재할까 하는

의문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시고

또한 전능하신 분이시라면

이 세상에 왜 고통의 문제가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땅에 고난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는

따로 특별히… 없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그냥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사실 고통이라는, 고난이라는

'현상 자체'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의미를 찾자면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고통이란  

(늘 존재하는) 우리 삶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이나 고통을

우리의 삶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일종의

벌로써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통을  피하거나

없애려 합니다


만일 죄를 지어 그 벌로써 고난을 겪고 있다면

얼른 죄를 회개하여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우리의 구원관에 반영되게 되면

우리는 뭔가 착한 일을 하게 되면

고통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고

반대로 죄를 짓고 나쁜 일을 하게 되면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천국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선하게 살았던 사람은

두말할 필요 없이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의 모습은

구원의 아주 작은 일부,

단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을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로 설명할 때

사람들에게 가장 강렬하고 명확하게

받아들여지기에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서

오늘날까지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특정한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아우르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이야기가 좀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난이나 고통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죄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죄와 고난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고통은 그저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삶 가운데 행복이 존재하듯

고통 또한 그저 삶 가운데 존재합니다

마치 빛이 존재하고

어둠 또한 자연스레 존재하듯 말입니다


사람들은 삶 가운데 고통이 사라지면

행복만이 남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온전란 삶이란

삶 가운데 고난이 제거될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 가운데

고난과 고통이 함께할 때 완성됩니다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 명작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그 안에 밝고 아름다운 색상과

검고 어두운 색상이 함께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나리자 같은 아름다운 그림에

어두운 색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제거해 버린다면

모나리자 그림은 볼품없는 그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고난은 좋고 나쁨의 가치 판단을 떠나

우리의 삶을 완성시키는 삶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둘이 서로 인과 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의 문제를 어려워하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고난과 고통을 인과의 법칙에 연관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원인에 의하여

고난이 발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언제나

인과의 법칙을 초월한 절대자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고난과 고통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

아마 욥기일 것입니다


욥기는

주인공 욥이 까닭 모를 고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루아침에 자식들이 모두 죽고

그 많던 재산도 없어지고

부인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또한 자신이 태어난 날과 밤을 저주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할 정도로

처참한 고난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욥에게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그가 받는 이 모든 고난의 이유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도 모든 재앙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은 믿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재앙과

자신의 죄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깨진 기왓장으로 몸을 긁으며

까닭 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찾아 오지만

신실한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까닭 없이

고난을 주실 리가 없다며

욥에게 위로 아닌 위로와 함께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회개할 것을 권면하는

친구들과의 논쟁으로 욥은 더욱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가 웬만한 가게  입구에 써붙여 놓는 유명한 성경구절 가운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가게를 처음 시작할 때 비록 처음은 보잘것 없이 시작했더라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나중에 크게 성공할 것이다

뭐 이런 바람으로 써 붙여 놓은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욥의 친구가 욥에게 회개를 권면하며 했던 말입니다

'네가 회개만 하면.. 그렇게 뻣댕기지 말고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네 시작은 비록 미약할지라도 나중은 창대하리라' 하며

욥을 힘들게 했던 친구의 말이었고

결국 이 친구는 나중에 하나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함부로 가져다 쓸만한

은혜로운 성경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암튼 욥은 친구들과 논쟁하며

답답해 미치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은

이런 고통은 당할 만한 죄를 지은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욥기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셔서

폭풍 가운데 말씀하시며

이 모든 논쟁을 잠재우십니다


그러나 이 결론 부분에서 조차도

하나님은 속 시원히

(욥이 바란 것처럼) 욥의 정당함을 입증해 주시거나

혹은 (욥의 친구들이 기대한 것처럼)

욥을 책망하지는 않으십니다


그저 인간의 지혜에 대해 책망하시면서

지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거듭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하늘의 우박창고를 보았느냐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하고  물으심으로써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 지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욥은 모든 것을 깨닫고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아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며 그토록 거부하던 회개를 합니다


우리가 욥기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욥은 고난의 이유를 궁금해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난데없이

세상의 창조에 관하여 장황하게 설명하시고

또 욥은 이를 알아듣고

친구들이 그토록 권면해도

아랑곳하지 않던 회개를 합니다


욥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갑작스러운 결말에 대해서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욥기도 성경이니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하며

욥기의 주제를

욥이 견기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나중에는 갑절로 보상을 받았다..

그러니 우리도 그런 욥을 본받아

끝까지 하나님을 배신하지 말고 축복받자

로 결론 내어 버리고 아멘 합니다


그러나 욥기의 주제가  단순히 그런 것이라면

그렇게 혼란스럽고 불분명하게 끝을 맺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말자는

그런 단순한 내용이 아닙니다


성경이 욥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고난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메시지는

우리가 이 땅 가운데 받는 고난은

단순히 인과의 법칙에 매여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비단 고난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행복이나 고난을

우리가 행한 어떤 일에 대한

보상이나 벌로써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이나 고난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나 벌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사고 틀 안에서만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 진리는 우리의 생각의 틀 안에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이해된 사실 앞에서는

경외심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특히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종교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입장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결론짓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이 욥의 세 친구를 책망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욥의 세 친구가 한 말 중 틀린 말은 별로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편에서

하나님을 위해 변증 하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이 틀릴 리가 없다'

'뭔가 욥에게 숨겨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죄가 있기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를 해야 한다'는 그들의 변론은

무척이나 신실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은

자신들의 지혜로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믿는

완고하고 독선적인 종교인들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부당하게 겪는 고통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욥이 회복되려면 자신의 (숨겨진)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을 일축해 버리십니다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선과 악을 자기 스스로 결론짓고 판단해 버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시며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욥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 중 하나는

고난과 고통은 삶 가운데 그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때론 고난이나 고통이 죄의 결과 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고난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죄지은 자를 성장하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신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는

'징계'라는 말로 자주 번역이 됩니다

징계는 일종의 벌입니다

고난이죠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훈련'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실제로 신약 성경에는 동일한 이 말이

징계라는 말로도 훈련이라는 말로도

번갈아 가며 수시로 번역됩니다


즉 고난의 보다 성경적 의미는

보다 성숙한 인격을 만들기 위한

교육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은혜란

고난을 피하게 하거나

면하게 하는 게 어니라

오히려 고난을 능히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감당할 수 있도록

이해할 수 있도록

성장시켜 주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이라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이 명하신 법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신실하게 따르게 되면

하나님이 도덕법에 의해 적절하게 보상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잘한 것은 상을 주시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항상 매의 눈으로

자신과 남의 잘잘못을 도덕적으로

가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그랬고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그렇습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가 구약의 계명이었다면


담배 피우지 말라

문신하지 말라

노랑머리 염색하지 말라 등은

현대판 계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십계명의 안식일까지 어기시면서

그러한 이분법적인 도덕법의 틀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도덕법은, 율법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일점 일획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시시비비를 가리고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할 뿐

인격적으로 자라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더욱 성숙해지도록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율법의 잣대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품습니다


온갖 구정물을 품고도 여전히 푸른

바다와 같은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바라보는 신앙적 관점이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고난과 고통은 우리가 피하거나 없애야 할  

일종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고난과 고통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보다는

우리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퇴비, 거름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퇴비는 더럽습니다

치워야 할 쓰레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퇴비를 주지 않으면

식물은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 가운데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온전해 지라는 것입니다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도덕법에 따라 그저 잘하면 복 받고

못하면 벌 받는 자리에서 더 나아가서...

잘하면 천국 가고

못 하면 지옥 가는 믿음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원인과 결과를 뛰어넘는 수준

인과법을 넘어서는 수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수준까지

자라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인과의 법칙을 따른 다면

원수를 사랑해선 안됩니다

원수는 복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어 놓을 것이 아니라

맞받아 쳐야 인과 법칙에 따른

세상 이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오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십리를 동행해 주고

겉옷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주라고 명하십니다


인과의 법칙 속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행위들을 명하십니다


고난과 고통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으면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난과 고통이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환 도구이다

라고 말씀드리면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해진다고 해서

신앙이 성숙해진다고 해서

고난과 고통이 면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면

다만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기꺼이 고난을 감내하게 됩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나 싶겠지만

사실 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의미가 파악된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난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은


사실 고난의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입니다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참다운 자유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고난의 의미에 대한 문제도

결국 구원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욥기에서 욥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이유에 대해 질문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그친 것입니다


진리를 깨우치게 되면 질문이 사라집니다

질문이 사라진 상태가 곧 구원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더 이상 왜? 하나님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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