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는 이제 연락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왔다. 그때는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겠다던 내가 지역모임에 가입해서 자기소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연락이 온 것을 봤고 그인 것도 알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당장의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 해질수록 그에게 답장은 뒤로 밀렸다.
그는 인간관계에 대한 우선순위가 없었다. 나를 만나고 있는 순간엔 '어 미안해 잠깐만 친구한테 급한 연락이 와서'라며 그와 긴박하게 카톡 하곤 했다. 그 내용이 뭔지 물었을 땐 소개팅 주선이라는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는 꼭 나와 있는 순간에 대답하지 않으면 그 순간이 지나갈 버릴 것처럼 급박했다. 그가 날 앞에 두고 타인과 연락을 할 때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가 그 앞에서 다른 사람과 톡을 한다면 기분이 더러울 텐데 그는 왜 그럴까' 속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을 때는 또 달랐다. 그는 어머니의 전화를 귀찮아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 그의 홀어머니는 몸을 갈아 넣어서 그를 장성시켰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같은 복잡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미새가 아기새를 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데 아기새는 그 품이 답답해 자꾸만 벗어나려 하는 모양새였다. 어머니의 벨소리가 나와 있는 순간에 계속해서 울렸지만 받지 않는 걸 보면, 나중에 배우자에게 할 그의 모습도 가늠이 됐다.
하지만 사람은 결국 본인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난 그런 행동들이 '일시적이고 예외적이었던 거야'라고 애써 생각했다. 하지만 미래의 시점에서 그 시점을 되돌아봤을 때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의사보다 그의 의사를 중시한다는 걸 행동을 통해 봤을 때, 상대방의 희생만 바라고 그는 절대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는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겪었을 때는 그를 미련 없이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는 끝까지 '미안해'라고 했다. 난 그 미안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의 함께하는 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과를 받아들이는 태도여야 했고 마침내 헤어졌을 때 나는 더 이상 그가 보기 싫었다. 그간 해왔던 모든 배려와 그에 대한 생각과 그가 가진 지위라든가 하는 것은 모두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해왔던 것은 호혜감에서였지 결코 상대방만을 위한 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일화를 겪을수록 결국 '인간은 본인의 틀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야'라고 생각하다가도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게 역겨웠다.
'뭐 해?' 안읽씹 했다.
'나 세종이야' 그가 다음날 카톡을 보냈다.
내가 기다렸던 말이기도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카톡 프로필 이름을.로 바꾸고 뒤이어 이어진 발신자표시제한도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완벽한 끝이었다.
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걸 왜 그리 놓지 못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놓았을 때 비로소 가져지는 건 또 왜 그런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