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프로손절러였다. 친하게 지내던 대학 동기가 있었는데, 취업 후 연락이 되어 만나며 회사생활 고충을 이야기하며 친해졌다. 회사에는 딱 그만큼의 빌런들이 있는 건지 서로의 회사사람을 욕하기 바빴다. 그녀는 그녀대로 이상한 지시를 내리는 관계부서팀원으로 힘들어했고 나는 나대로 본인이 지시한 일을 내가 하라고 하랬다는 괴상한 사람으로 힘들어했다.
서로의 연애사에도 조언을 주며 친밀해졌다. 그녀는 가장 사랑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떠나자 상실감으로 괴로워했는데 그때 나는 '그래도 우정은 남잖아'위로했다. 그녀는 그 말로 위안을 받았는지 서로가 싱글이던 크리스마스에 우리 집에 와서 직접 만든 케이크를 건넸고, 장을 봐서 음식을 해 먹으며 관계가 영원할 거라 그때 당시에는 믿었다.
어느 날 약속을 했는데 그녀가 말없이 늦는 것이었다. 10분이 지났을 때는 그러려니 했고 20분이 지났을 땐 그녀에게 연락을 했더니 '가서 설명할게'라고 하는 것이었다. 옆 테이블에선 결혼을 약속한 커플이 별일 아닌 일로 화를 내서 파혼했다는 이야기를 세 여자가 하고 있었다. 30분이 지날 무렵엔 화가 났고 40분이 지나서 그녀가 왔을 땐 화를 퍼부었다.
"늦으면 늦는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야 할거 아냐"나는 소리를 질렀다. 옆 테이블 3명의 여자가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말했다. '집에 좀 일이 있었어'
"그럼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해야 하잖아"
그녀는 끝까지 말을 얼버무렸다.
'무슨 일인지 얘기해.'라고 나는 다그쳤고 그녀가 말했다.
"부모가 돈 때문에 싸웠어. 잘못된 투자를 한 게 있었는데 서로를 비난하길래 그거 말리느라"
그녀는 마지못해 말했다.
'그럼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출발할 때 이야기했으면 내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잖아'라고 난 말하며 상황은 일단락된 줄 알았다. 우리는 이태원에서 곱창을 먹고 여느 날처럼 버스를 타고 서로의 집을 향해 갔다.
하지만 그날 내 어조와 제스처가 과했는지 그녀는 집에 가서 말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던 거 같아. 내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관계를 지속해야 할 필요도 모르겠고'
'안돼 우리가 지내온 시간이 얼만데 이렇게 쉽게 절교하자고?'
나는 설득했지만 이미 마음이 상한 그녀의 맘은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어떤 빌미에 불과했고 사소한 징후는 그전에도 있어왔다. 그녀가 내 성과를 비아냥거리는 일이나 서로의 회사 고충을 말하면서 상대방의 고통에 즐거워했던 것 등이었다.
그녀가 그녀의 가정사를 말한 걸로 인해 나는 더 가까워진 줄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역린이었고, 내가 지나가듯 말한 우리 집의 불화로 (그동안) 그녀는 위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전까지 그녀 집안사정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고, 그래서 '평온한 가정이구나'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그녀 또한 남자형제에게 재정적 지원이라든지 (가족의) 돈에 대한 팍팍함이 그녀를 힘들게 해왔단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그런 사정을 말했을 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이태원에서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 이후로 인간관계에 대한 큰 환멸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대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노라 했다. 하지만 삶의 큰일이 있을 때는 사람을 찾게 됐고 그렇게 찾게 된 B는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필요할 땐 시간을 내줬고 커피를 사줬다. 속도가 빠른 오픈카로 도로를 쏘는 것도 시원했다. 하지만 그의 호의에 대한 대가로 날 취하려 했을 때 나는 그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그는 계속해서 날 설득했다.
'가지 마. 그렇게 가면 내가 뭐가 돼'라고 그는 말했다.
'널 만난 걸 후회해.'라고 난 말했다.
실랑이 끝에 나는 그의 집에서 끝까지 경기를 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가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는 걸로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집의 도어록을 열고 들어오며 그에 대한 실망감은 감출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보다 그가 원하는 게 우선인 그런 애였다. 그는 '다음 주에 보자'라고 했고 나는 다음으로 미뤘다. 한 달이 지나 연락이 왔을 때 '당분간은 대전으로 가지 않겠다'라고 했다. 어차피 내가 가지 않는 한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나 올해가 지나기 전 보자는 말에는 '오늘은 좀 피곤하네. 먼저 잘게'라고 12시간 후에 카톡을 보냈다. 그는 내 말 뜻을 알아들었을까? 그의 비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석함이나 입안의 혀처럼 구는 기질이 좋았다. 하지만 이제 좋지 않다. 만나고 싶지 않고 시간을 내고 싶지 않다. 이렇게 서서히 멀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