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그럼 그때쯤엔 내가 누구와 함께 있고 결국 남은 사람은 누가 될 건지 알 수 있으니까. 갑자기 돌아가신 상사에게 느낀점은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고 내 옆의 사람이 영원하지 않단 것이었다. 난 그게 누가 될지 궁금해할 뿐이었지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윤도 그런 사람이 아닐 거란 희미한 감정이 들 뿐이었다.
며칠 전 그가 나의 동의 없이 몸을 터치했을 때의 공포스러운 감정이 되살아났다. 분명히 그때 상황에 대해 사과를 받았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했지만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몇 번이고 가겠다고 하는 나를 그는 잡았고 어쩔 수 없단 듯이 한 시간가량을 더 있다 나왔지만 다음날이 되고 그다음 날이 되어도 분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와 그가 만남을 종료하자고 한 날 나의 지배성 때문에 그를 잡은 걸 후회했다. 난 사람을 오래 봐야 한다는 명목으로 한번 더 보자고 말했지만 사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싫었던 것이었다.
그를 테스트한 나도 싫었다. 사람을 알아갈 적에 내가 취하는 스탠스는 한없이 잘해줘 보고 그의 반응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만남은 항상 내가 그의 지역으로 가야 했고 내가 결정적인 상황일 때 그는 내게 없었다. 그는 그런 것들을 돈이나 칭찬으로 무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옹졸하게 그를 만나러 간 횟수를 세고 있었다. 그의 불우한 과거를 들었을 땐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는 말에도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해 묻는 것에 비해 그가 나에 대해 묻는 것은 없었을 때 의심을 했다. 나만의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만들어놓고 그에 미치지 못하자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관계를 이어 온건 나였다.
그 일 이후로 그를 떼어내고 싶어졌다. 관계는 항상 사소한 일로 결단나곤 했다. 그는 그 이후로 명절 잘 보내라는 말을 보냈고 읽씹 하자 만나자고 청해왔지만 기약 없이 미뤘다. 만나자고 하는 순간 그가 또 본인이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그가 '세종에 있지?'라고 물었을 때 올 것을 짐작했지만 여기로 와도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할 얘기도 별로 없는데-란 생각이 거절하게 만들었다.
난 그의 똑똑함과 친화력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이기적이었고 은연중에 그의 사회적 위치가 나보다 높으니까 배려해야지 생각했던 나도 싫었다. 계급장 떼고 친구관계를 형성한다면서 어떻게든 그보다 나은 걸 만드려고 주식투자에 열중하거나 음악연주에 몰두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기심이 나를 이용하는 걸로 나타났을 땐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나 이용해'라고 얘기했던 건 나였다. 그런 얘길 한 배경은 그의 모든 행동이 날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빈정거린 것이었다. 그가 만남을 지속할 때마다 손을 잡고, 포옹을 넘어서 키스로 넘어갈 때의 단계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나 자체로 대한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신 만나지 않을 예정이다. 만남을 미루고, 답장을 늦게 하고 기억하지 못하면 그도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인연을 함부로 맺는 게 아닌데 어릴 적 나는 만남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결국 '주변에 하도 사람이 없으니 너와 나도 언제까지 갈지 궁금해진다'라는 나의 말은 4년간의 연을 끝으로 종료하게 되었다. 사람을 잃는 것도 면역이 생긴 건지 이젠 그 아픔도 덜하다. 진즉 이렇게 될 거면 더 빨리 그랬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뿐이다. 더불어 내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던 준이 잠깐 생각났지만 그와도 이미 종료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