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락가락 한 일요일 늦은 오후, 스터디 카페에 왔다. 좌석은 38번.
비가 흠뻑 내렸던 어제도 이곳에 왔었다. 오늘과 똑같은 38번 자리.
그리고 -비록 이번주부터 시작했지만- 평일, 퇴근 후에도 왔다. 평일 오전 고정석이었던 44번.
스터디카페에 있는 시간 동안 글만 적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내가 이곳에 온 목표는 집중해서 글을 적는 것이다. 스마트폰에도 있지만 굳이 돈 들여 산 타이머를 돌려가며 1시간 30분 간 초집중(?) 하기 위해. 하지만 글만 적지 않는다. 대부분 단편소설 당선작품들을 읽고 다이어리도 적는다. 그리고 로비에 마련된 과자(건빵)를 먹고 주스와 커피도 마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하지 못했던 엎드려 자는 것도 자주 한다.
위에서도 밝혔지만 이곳에 오면 거의 똑같은 자리에 앉는다.
오전에 오면 44번, 오후에 오면 38번. 그래서 휴직 중엔 주로 44번, 지금은 48번에 앉는다.
내가 앉는 자리는 똑같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변한다.
평일 오전엔 사람이 많지 않다. 10시는 돼야 한 두 명씩 오는데 주로 나처럼 중년으로 보이는 분들이 많다. 공인중개사 수험서를 보는 아저씨, 신문을 펼쳐놓고 보는 아저씨, 아예 대놓고 유튜브를 보는 아줌마. 토익이나 인기가 시든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거나 대학생도 간혹 보인다.
퇴근 후엔 고등학생들이 많다. 저녁 8시가 넘으니 의외로 직장인들이 꽤 왔다. 넥타이와 양복을 입거나 클래식한 투피스 정장 스타일의, 누가 봐도 딱 샐러리맨 같은 사람. 하루종일 바쁘게 일했을 텐데, 저 사람들은 무엇이 간절하길래 집에 가서 편하게 쉬지 않고 여기로 오는 것일까. 나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독서 따위를 하려고 오는 것 같진 않은데. 나를 포함, 회사와 관련되지 않은 꿈을 가진 직장인들을 응원한다.
오늘은 중학생이 많다. 다른 자리를 넘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투명 칸막이라 어쩔 수 없이 옆, 앞자리에 펼쳐진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3학년 2학기 중학 생물, 2학년 1학기 사회, 국어, 수학. 다양한 과목의 교과서와 문제집들이 펼쳐져 있다. 여학생은 소곤소곤해서 남학생은 우당탕탕해서 귀엽다. 난 이제 엄마의 마음이니까 그들이 얘기를 하든, 웃든, 자든지 다 귀여워 보인다. 우리 아들 둥이가 컸을 때, 같이 공부하러 다닐 친구들이 두세 명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엄마로서의 희망도 가져본다.
모두들 코를 박고 열심히 문제를 푸는 것 같다. 둘러보니 꼿꼿하게 머리 들고 한량처럼 소설책이나 읽는, 아줌마는 나뿐인 것 같다. 아줌마의 짝꿍인, 아저씨도 보이질 않는다. 그제야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게 떠올랐다. 가족과 함께 보내야 되는 일요일. 아줌마이자 애 엄마인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공부가 본업이었던 학창 시절 땐 실컷 놀다가 뒤늦게 공부하는 학생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아닌지. 육아와 살림은 안 하고 나이에 맞지 않게 웬 스터디카페. 현재의 내가 과거의 과업을 그리워하듯,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그리워하고 있진 않을지. 아직 엄마품이 좋다고 파고드는 아들 둥이와 착한 남편과의 생활을 좀 더 갖지 못한 걸 미래의 내가 후회하려나. 성인이 된 아들이 나랑 놀아줄 리 만무할 텐데 지금 아들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까.
그걸 알면서도 난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시간을 모으고 싶기 때문이다. 한 시간 두 시간이라도 글을 적고 싶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왜 글을 적고 싶어 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글을 적지 못한 날은 두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우울증도 심해지는 것 같다. 글만 적으면, 책만 읽으면 몸과 마음이 가뿐해진다. 아마도 글을 적으면서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내 생각을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열심히 무엇인가를 읽고 적는다.
귀한 시간을 모아 한 줄 두줄 적는다.
언젠가, 아들 둥이와 놀지 않고 글을 적고 있는 이 시간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