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연민』, 마사 누사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RHK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큰 의문점이 들었다. 제목은 '타인 대한 연민'임에도 불구하고 '연민'이라는 단어는 몇 번 밖에 언급되지 않는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키워드는 Fear(두려움)이다. 번역된 도서를 읽는 한국인 독자로써 두려움과 연민의 관련성에 대한 번역가의 의도에 대해 궁금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두려움은 곧 닥칠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일에 대한 괴로움과 이를 물리칠 힘이 없다는 무력감으로부터 발생한다. 즉, 나쁜 일이 다가오는 와중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감정이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설명하면서 연민은 타인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우리 또한 당할 가능성을 목격했을 때 발생하는 괴로운 감정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두려움과 연민의 공통분모는 괴로움이란 걸 유추할 수 있는 동시에 두려움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연민은 타인의 입장에서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번역가는 왜 굳이 두려움이라는 원제에서 연민으로 대체하였을까? 혐오가 팽배한 시대에 협력과 인류애를 강조하는 누스바움의 촉구가 어떻게 연민으로 해석되었는지 번역가의 인터뷰를 검색 봤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누스바움이 말한 '분노에서 벗어난 보복 없는 저항'을 위해서는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연민의 감정이 필요하다는 번역가의 한국인 독자를 향한 개인적 호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동시에 원제에 충실했으면 어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보다 더 논란이 많은 점은 분노한 사람이 일종의 보복을 원하는데, 이것이 바로 분노의 구성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이다. 분노에 대해 언급한 모든 서양 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소망을 분노의 구성 요소로 언급했다. 보복에 대한 소망은 미묘할 수 있다. 분노한 사람이 반드시 직접 복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법적 처벌을, 신성한 재판의 형태를 원할 수도 있다. 분노 대상의 삶이 앞으로 잘못되기를 바라는 거로 그칠 수도 있다." (107)
분노는 고통을 갚고자 하는 보복성을 내포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와 있다. 살인자를 죽여도 희생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이를 희생자 가족을 위한 정의라고 사회에서는 말한다. 나 또한 이 법칙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원리라고 생각했다.
2016년에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지팡이를 짚고 왕복 한 시간이 걸리는 언덕길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 하러 나가셨다. 그러다 전역한 기념으로 술 마시고 오토바이를 몰던 음주운전 자가 내리막길에 속도를 줄이지 않고 가다가 할머니와 출동했다. 소식을 듣고 중환자실로 찾아가서 발견한 할머니는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어두운 보라색으로 부어있었고 온몸은 미라처럼 붕대에 감싸여있었고 팔과 다리는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이 모습을 목격하고 항상 친절하신 할머니를 잃게 될까 봐 밀려오는 두려움과 동시에 그 음주 운전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휩싸였다.
나의 아버지는 가해자의 아버지와 만나셨다. 나는 아버지가 합의하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해자가 나와 같은 나이의 청년이며 홀아버지 아래서 자랐다는 사정을 들으면서 결국 합의를 했다. 홀아버지라는 동정 때문이었을까, 나와 같은 또래의 아들이 있다는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틴 루터 킹처럼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차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복 없는 저항'을 실천한 인물들을 보면서 존경심이 들면서도 나는 그와 같은 성인군자의 믿음을 가질 수 없음을 느끼고 좌절했다.
"믿음은 비현실적이거나 이상적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중략) 인류가 결코 유지할 수 없는 완벽한 정의처럼 목표가 비현실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희망은 절망과 냉소로 이어지기 쉽다. 진실한 삶이야말로 우리가 믿어야 한다." (264)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나 막상 나에게 상황이 닥쳤을 때 감정적 대응을 할 수 있겠냐는 의문에 작가 또한 전 배우자의 두 번째 결혼이 참담하게 실패하기를 바라는 소심하게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누스바움의 말은 좌절한 나에게 위로로 다가왔다.
"대니 마셍의 노래는 화해의 다리를 놓는 새로운 사랑을 촉구했고 이는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사람이 언제나 모두를 사랑할 필요는 없으며 그저 변화를 만들 만큼만 사랑하면 된다고 믿는다." (265)
아버지는 가끔 그 당시 가해자가 어떤 심정이었을지에 대해 생각한다고 하셨다. 합의라는 용기 있는 결단은 연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제야 나는 번역가가 적절한 제목을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