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압약이 똑 떨어졌다.
월요일인 8월 1일에 혈압약을 먹고 4일째인 오늘 목요일까지 걸렀다. 오늘은 아무리 더워도 잊지 말고 병원에 다녀와야겠다고 아침 걷기를 하면서도 별렀다. 침묵의 살인자라는 고혈압이 부디 오늘 약을 처방 받아 복용하기까지 조금만 더 참아주기를 바랐다.
몇 해 동안 이 병원을 드나들면서도 어떻게 목요일은 오전 진료만 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대기실 의자에는 물론이고 복도에까지 환자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 전에도 병원에 환자가 많기는 했었다. 코로나가 몇 개월 소강상태인 시절에는 건강검진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인해 역시 북적거렸다. 코로나가 재확산하게 되면서 공간을 쪼개 검사실을 하나 더 만들고 안내데스크의 간호사 또한 세 사람에서 네 사람으로 늘었다.
혈압약 처방전 받으러 왔다는 내 말에 신입인 듯한 간호사가 옆 간호사에게 묻고 다시 원장실에 다녀오더니 바로 처방전을 뽑아 건넸다.
"간호사 언니, 피부과 약도 함께 부탁 드릴 수 있을까요?"
간호사는 단호했다.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고는 있었지만 조금 전 옆 자리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건 안 돼요. 원장님 면담은 최소 30분은 기다리셔야 해요. 내시경 하실 분도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시무룩해 하는 내게 간호사가 한 마디 더 건네며 이해를 구했다.
"오늘이 목요일이라 오전 진료만 있어서 더 복잡하긴 해요."
"그럼 내일 혈압약이랑 피부과 약 함께 받으러 와도 될까요?"
"그러셔도 되죠. 그렇다고 내일 환자분들이 확 줄어들 거라고는 말씀 드릴 수 없어요. 요즘 코로나 환자들이 또 많이 늘었거든요."
"잠시만 생각해 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혈압약만 받아가지고 돌아갈까?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 더운 날 피부과까지 들를 생각을 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다고 여기서 피부과 약 처방을 해 준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의사선생님을 만나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다른 간호사들은 물론 나를 응대했던 간호사 또한 정신 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잠시라도 빨리 ㅐ 의사를 결정해 알려주어야 할 것 같다. 기왕 왔으니 일단 원장님 뵙고 피부과 약까지 처방을 받을 수 있다면 손해볼 것도 없겠다. 차를 타고 피부과까지 다녀오고 나면 오늘도 지치고 말 테니 말이다.
"언니, 시간 끌어서 죄송해요. 30분 기다렸다 원장님 뵙고 갈게요. 목요일은 오전 진료만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막상 병원 올 때는 깜빡했네요."
"괜찮아요. 그러실 수 있어요. 많이들 그러시기도 하구요."
언제나 만원이니 다른 병원으로 옮길까 잠시 흔들렸던 생각을 바로잡았다. 처음 얼굴 대하는 간호사의 말 한 마디가 흔들리는 사람 마음을 바로잡은 것이다.
그때 내시경실에서 나온 원장님이 진료실로 바삐 들어갔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불렀다. 최소 30분을 기다리라던 그 시각에서 내가 우왕좌왕 생각을 하는 사이 많아야 10분 정도 흐른 것 같았는데 벌써 30분이 흘렀나 보다.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바삐 진료실로 들어갔다. 혈압약 처방은 이미 받았으니 피부과 약 처방만 받으면 되었다.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이런 날은 빨리 결정을 해 주셔야 해요. 요즘 정신 못 차리게 바쁘네요. 코로나 환자가 더 늘어나는 바람에 숨돌릴 틈이 없어요. 이러다가 저 60도 되기 전에 쓰러질까 겁납니다."
너무나 놀라운 말이었다.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의사선생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피곤이 누적되었을까 싶었다.
"죄송해요, 원장님께 피부과 처방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원장님, 그런 생각이 드실 정도로까지 피곤하시면 안 돼요. 조금씩 쉬어가시면서 진료 보셔야 할 것 같아요."
활짝 웃고 계시지만 내 눈에는 피곤이 겹겹이 쌓여서도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네 조심할게요, 감사합니다. 혈압약 말고 또 필요하신 게......?"
"이 얼마 동안 알러지 때문에 며칠에 한 번씩 알러지 약 먹고 있어요. 처방 받아온 약을 다 먹었는데 선생님께서 약 처방해 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너무 더워서 피부과 가는 일 하나 줄일 수 있을까 해서요."
"그럼요. 한 일주일 치 처방해 드릴까요?"
"좀 더 길게 주셔도 되는데요. 약 이름은 OO이구요."
처음 피부과를 찾은 것은 텃밭을 시작하고 한참 지났을 때였다. 어느 여름 텃밭에 다녀온 다음날 팔에 오돌도돌 붉고 작은 반점이 돋았다. 그리고 많이 가려웠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소위 풀독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그런 증상인 듯했다. 처음 피부과 처방을 받은 약은 첫 사흘은 하루 한 알씩 복용하고 다시 진료를 받은 후에는 하루 반 알씩 복용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는 해마다 텃밭에 다녀온 후에는 예외 없이 알러지 약 처방을 받아 복용해야 했다. 점차 '텃밭이 뭐라고.'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텃밭을 멀리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피부과 약을 먹어가면서까지 텃밭을 가꿀 필요가 있는지 새삼 고민하게 되었다.
텃밭을 접다시피 하면서 알러지도 가라앉았다. 봄에 두어 번 가을에 한 번 텃밭에 들르는 건 풀구경을 다니는 것이지 작물을 가꾼다고는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재작년 초겨울 피부과 선생님은 알러지 약의 부작용 등에 대해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내 앞에서 자신도 알러지 약 한 알을 꺼내 입 속에 넣고 물을 마셨다.
"걱정 마세요. 저도 알러지 있어요. 이제 저는 며칠에 한 번 시간을 정해 놓고 약을 먹습니다. 피부과 약 중에는 하루 두 알 먹는 약도 있고 한 알 먹는 약도 있어요. 시간만 잘 맞춰 드시면 돼요."
그때 처방 받아온 서른 개의 약 중 마지막 한 알을 그저께 새벽 4시 30분에 먹었다.
약사로부터 혈압약과 알러지 약을 받아들면서 확인 차 다시 물었다.
"약사님, 이 알러지 약 말씀인데요, 부작용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약사가 물었다.
"왜 걱정되는 일이 있으세요?"
"항히스타민제의 부작용이 지금보다 더 나이 들었을 때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알고 싶어서요."
"이 약을 매일 드시나요?"
"아뇨. 증상이 나타났을 때만 먹는데요, 때로는 연중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사나흘에 한 번씩 몇 번 먹기도 하고 일년 내내 안 먹을 때도 있어요. 먹기 시작한 지는 십 년 좀 넘었구요."
"그러시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일년 삼백육십오일 계속 복용하시면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며칠에 한 번 그것도 띄엄띄엄 드시는 거라면 괜찮아요. 우선은 알러지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급선무니까 그때만 복용하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여름 잘 지내시구요."
며칠 전 우리나라 대형 병원의 간호사가 병원에서 쓰러져 제대로 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일반인에 비해 제때 의료 혜택을 안전하게 누릴 거라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는다.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 되면서 나처럼 병원에 대해 문외한인 이들이 의료인들을 또한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러다가 저 60도 되기 전에 쓰러질까 겁납니다."
울림이 오래갈 듯한다. 머리카락 윤기가 사라진 연세 많으신 정형외과 원장님도, 분홍빛 도자기 피부를 가진 피부과 선생님도, 한때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 수염을 말끔히 깎아낸 지금까지도 우리집에선 털보선생님으로 통하는 한의사 선생님도, 오늘 내게 혈압약과 피부과 약을 처방해 주신 내과 원장님도, 그리고 그 주변 약사님들도 한결같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심에 새삼 감사하다.
오래 전에 60을 넘은 나는 살아있는 동안 더 건강하게 가능하면 더 오래 살아보자고 안간힘을 쓰면서 나보다 병이나 약에 대한 지식이 많은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병이나 약에 대해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낱낱이 풀어 친절한 설명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 또한 열심히 쉬지 않고 배우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에 비하면 나는 내가 배운 것을 세상 누군가에게 얼마나 열심히 나누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나 한 사람 건사하기에도 바쁜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봐도 가족들 건강이나 염려하며 위해 내가 아는 뭔가를 나누고 있다.
스스로에게 던진 부끄러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이 나올이 없다. 더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