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2학기 겨울의 시작과 함께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사는 일이 녹록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아버지가 정부 시책에 따라 전라도 어딘가로 이주 신청을 했고 이주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12월 겨울 방학 전 정해진 이사 날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사를 앞두고 늦은 저녁 큰 고모가 나를 큰집 작은 방으로 불러 노래를 가르쳐 준 일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아픈 춘심이 언니도 함께였다. 큰 고모는 당시 유행하는 노래라며 ‘빨간 머플러’와 몇 가지 유행가를 가르쳐 주었다. "이 정도 노래는 알어사 쓰제이. 가시나들이 입에 달고 댕기는 노래 아니냐?" 2학년 때도 ‘앵두나무 우물가에’와 ‘서울 가면 운이 터져서’ 등의 두 가지 노래를 가르쳐 주어 동요에 대해 배운 시간에 주욱 뽑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유행가 가사는 왜 그리 외워지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떠나는 나를 위해 조촐한 이별 행사를 마련했다. 순우가 먼저 내가 이사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학급 친구들에게 전했다. 그런 후 고무줄과 공놀이 친구들이 교단에 올라 한 줄로 나란히 섰다. 석별의 정, 이별의 노래 등을 불렀다. 진짜 이사를 가기는 가는구나, 시간이 지나면 나는 이 자리에 없겠구나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공놀이와 고무줄놀이 순간들과 노래들이 머릿속을 한달음에 흘러갔다. 눈물이 찔끔 났다. 공을 치마 안에 감추며 깔깔거리고 사까닥즈와 화야를 하느라 다리와 머리가 하늘로 치솟던 장면들, 뛸 때마다 치맛 속 팬티들이 슬쩍슬쩍 드러나던 장면들이 큰 물에 쓸려가듯 마구 떠내려갔다.
사까닥즈는 술래 둘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양쪽에서 고무줄을 잡고 친구들의 합창에 맞춰 술래들 주변을 뛰고 돌며 고무줄을 넘는 놀이이다. 오금 높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고무줄 높이를 올린다. 나중에는 두 술래가 손을 뻗쳐 고무줄을 높이 올릴 수 있는 데까지 높이는데 이때는 평소처럼 두 다리로 훌쩍 뛰어넘을 수가 없다. 두 손은 땅을 짚고 두 다리를 하늘로 쭉 뻗어 고무줄을 발끝으로 잡아 내리지 않으면 넘기가 어렵다.
화야는 오금 높이의 고무줄 위를 돌면서 이쪽저쪽으로 뛰어넘으는 놀이로 넘어야 할 개수를 정하고 고무줄에 몸이 닿아도 될지 안 될지 등의 탈락 사유를 우리 나름으로 정한 규칙이 있는 놀이였다. 시간이 부족할 땐 30번 돌기를 했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50번을 돌기를 했다.
화야를 할 때면 나는 자주 고무줄놀이를 가장 못하는 아이가 있는 편에 들어야 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짝을 맺지는 않았다. 다른 고무줄놀이도 처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화야 50개를 혼자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은 내가 가장 못하는 아이가 있는 편에 들어가야 공평하다고 입을 모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던 시절이라 4학년임에도 불구하고 매달 시험을 치렀다. 나는 시험 결과가 나온 후 월요일 아침 조회 때면 전교생들 앞에서 4학년 대표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받곤 했다. 전교생들 앞에서 단상에 올라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받고 박수를 받는 일이 살갗이 간지러울 정도로 쑥스러우면서도 고된 엄마 아버지를 기운 나게 할 일이기도 했다.
얼굴에 약간의 마마 자국이 있긴 하지만 눈도 크고 키도 컸던 언니가 이번에 학교 최초로 무학여중에 들어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친구들은 내게도 무학여중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거라며 부러워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곧 시골로 이사를 해야 할 상황이어서 핏덩이를 데리고 이사할 일로 아버지와 엄마의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사를 며칠 앞둔 밤 막내 여동생이 숨을 쉬지 않는다며 막내를 안은 엄마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가족이 모두 안방으로 모였다. 아버지가 두루마리 백살경을 꺼내어 '남무 ...귀살신'을 읽어 내려갔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런 후 미리 대령해 있던 식칼을 공중으로 던졌다.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칼 끝이 향한 방향을 보고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겨울인데도 흥건하게 배어난 얼굴의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말했다.
"살겄네."
"살었소. 숨 쉬요."
엄마가 막내를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내가 아무리 오래 병원에 다녀도 기침이 낫지 않고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던 초등학교 1학년 겨울에도 아버지는 누워 있는 내 곁에서 ‘남무...귀살신’을 읽었다.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귀신과 관련한 의식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아버지 곁에 누워 아버지의 그 긴 경 읽기가 끝나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조용히 해야 한다고 일러준 사람은 없었다. 내 몸이 스스로 알아서 그 일이 진행하는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까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색색거리며 누운 내 곁에서 아버지는 ‘남무...귀살신’을 읽었다. 터져 나올 것 같은 기침을 참느라 온몸에 잔뜩 힘을 주며 아버지의 경 읽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때 아버지의 경 읽기는 길고도 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을 읽은 아버지가 비장한 표정으로 허공에 대고 식칼을 던졌다.
“살겄네.“
그때도 아버지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아버지 얼굴에서는 자갈을 캘 때 보았던 것보다 더 굵은 땀방울이 녹아내리는 고드름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면서 비로소 백살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백살경은 필체 좋은 아버지가 어렸을 때 필사한 듯 삐뚤빼뚤한 한글 붓글씨로 적혀 있었다. 나는 다른 것 다 말고 이 ‘백살경’을 내가 가져도 될지 엄마와 형제들의 동의를 구했다. 누구도 관심 없는 아버지의 필사본 ‘백살경’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