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청계서초등학교

by 장미

4학년 겨울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청계면 도대리에 있는 청계서초등학교 한 반뿐인 4학년 교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말 수가 더 줄었다. 부모의 가난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한 이후 말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새 학교에 적응하면서 눈치를 살피느라 그랬는지 도대리로 이사 온 후로는 공부 시간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몸으로는 놀이에 열중하면서도 생각은 늘 서울에 두고 온 친구들에게 가 있었다. 떠나지 않고는 안 되는 일이었을까. 나는 동생을 셋이나 거느린 채 강아지처럼 엄마 아버지를 따라와 바닷가 마을에 사는 서울내기가 되어 있었다.


아이란 줄을 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을 넘기면 그 줄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강아지와 같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은 어른이 가자면 가야 하고 어른이 앉으라면 앉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이 떼를 써서 될 일인지 아닌지를 누구보다 빨리 파악한다. 줄을 넘기면 따라가야 할지 떼를 써야 할지 순간 판단하고 그 순간의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





놀이에 목숨을 건 듯 놀았다. 잠결에 목구멍으로 무겁고 진한 무엇인가가 꿀떡 넘어가는 느낌에 깨어보면 흰 무명 베갯잇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처음엔 놀라서 엄마를 불렀지만 점차 조용히 일어나 내 코피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게 되었다.


몇몇 동갑내기들은 내게 다가와 손도 잡아주고 말도 걸어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반면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아이들 몇이 눈을 힐끗거리고 입을 삐죽거리며 내게 친절한 아이들을 대놓고 나무라기도 하였다.

“느그들은 비알도 없냐? 서울서 왔으면 왔제 저것이 우덜하고 믓이 다르다고 그러게 찰싹 붙어서 그라냐? 믓이라도 생긴다냐?”


도대리에 내려온 후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침 차숙이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렀다. 학교 공부는 꽝인 차숙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빠뜨리지 않고 다 썼다. 학교 공부는 진 적 없는 나는 세례 요한이라고 딱 하나를 썼다. 빵점을 맞았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준 사람이라는 것을 어른이 되고 나서 교리 공부 시간에 알게 되었다. 사람마다 잘하는 뭔가가 있고 다 잘하는 것 같아도 맹점 몇 개는 갖고 있는 것이 사람임을 처음으로 뼈아프게 깨우친 날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차숙이는 크리스마스 날 밤 하얀 옷을 입고 율동을 섞어가며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해냈다.


4학년 겨울방학을 보내고 5학년을 맞았다. 우리 옆집에 늦게 이사 온 광희와 새로 부임하신 5학년 담임선생님이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졌다. 연애. 아이들은 쉽게 입에 연애라는 말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 중 내 입에는 올리지 않는 말이 몇 가지 있다. 연애라는 단어도 그중 하나다.


초여름쯤인가 광희는 내게 두어 번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혹시 동네에 퍼진 담임선생님과의 이야기를 하려나 내심 궁금했으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하긴 열일곱 살짜리가 열두 살짜리에게 인생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광희네는 이사를 갔다. 선생님이 광희네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는 광희네가 이사 간 후에 들었다. 광희는 그 선생님과 결혼을 했을까? 어떻게 선생님과 결혼을 하지? 가끔 광희가 궁금했다.





5학년이 되고 전교생이 바닷가로 봄 소풍을 갔다. 전교생이라야 서울 학교 한 학급 정도밖에 안 되는 60여 명 아이들이었다. 바다를 바라보고 선 묵은 동백나무 아래에 모여 점심을 먹고 보물 찾기를 하고 장기자랑 시간을 맞았다. 그 사이에도 드문드문 남아 있던 붉은 동백꽃들은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6학년 반장 오빠가 노래를 불렀다. 가끔씩 모자를 삐딱하게 쓰곤 해서 내 맘에 들지는 않았던 오빠다. 그런 오빠가 껑충 올라간 검은 교복 소매와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목과 발목을 흔들어대면서 노래를 부르니 더 껄렁해 보였다. 그런데 그 오빠도 내가 2학년 때 그랬던 것처럼 동요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에 틀림없었다. 마지막인 듯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툭 떨어졌다. 동백꽃도 노래를 알아듣나 싶었다.


반짝이는 별 빛 아래 소곤소곤 소곤대던 그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아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모질게도 밟아 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단꿈을 꾸고 있나 야속한 님아 무너진 사랑 탑아





어느 날 등굣길에 내게 텃세를 많이 부렸던 아이 중 하나인 희숙이가 뱀 대가리를 잡고 휘휘 돌리며 내 앞을 가로막았던 적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나를 힘들게 했던 희숙이, 눈도 크고 숱 많은 흑단 같은 긴 머리카락이 보리 이삭 여러 개를 비끄러맨 것 같던 아이였다.


중학교 입학 후 1학년 때였다. 하교 중 중앙청 옆길에서 희숙이와 마주쳤다. 나는 한 5분 정도 우쭐했었다. 여기 어쩐 일이냐고 묻는 내게 희숙이는 서대문에 사는 친척 집에 왔노라 답했다. 그때 나는 내 교복이 주는 의미를 새삼 크게 느꼈다. 희숙이는 뱀 대가리를 잡고 내 앞에서 휘두른 적은 있지만 나중에는 참 좋은 친구로 남았다. 그럼에도 뱀으로 나를 위협했다는 사실만은 잊히지 않았다.


희숙이는 교복 입은 내 모습을 보고 약간 주춤하는 듯 보였다. 도대리와 청계서초등학교는 잠시나마 내게 마치 화산 폭발이라도 있었던 듯 큰 분화구처럼 남아 있는 시절이다. 그 아이들은 사람에게도 ‘이것’이나 ‘저것’, ‘그것’ 등을 붙여 지칭하곤 했었다. 희숙이는 그날 바로 그 ‘~것’이었던 서울내기가 교복을 빼입고 자기 앞에 서 있는 모습에 조금은 당황하는 거라고 넘겨짚어 생각했다. 너무 크게 맞춰 교복이 나를 둘둘 말아 굴리고 다니는 것 같았음에 분명할 교복에게 고마워 희숙이 앞에서 유치하게 교복 먼지 터는 시늉까지 했다. 두어 해 전 나를 향해 뱀 대가리를 잡고 흔들었던 아이에 대한 소심한 복수를 의도치 않은 시기에 나 대신 교복이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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