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착한 도대리 마을은 정부의 서해안 간척 사업 정책 계획에 따라 서울 각지에서 내려온 총 50가구의 집단 이주 주거단지였다. 간척 사업은 바닷가에 위치한 채석장에서부터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정중앙의 작은 섬까지 막는 것이 1차 목표였다. 이사 온 그해 겨울 간척 사업은 채석장에서부터 그 섬의 1/4 지점 정도까지 진행된 상태였다. 간척 사업에 외부 인력을 쓰다 보니 진척이 없자 인력을 가족 단위로 작업장 가까이 이주시키는 계획으로 변경했을 거라고 어른들은 입을 모았다.
중단한 방조제 돌들은 마름모 모양으로 엮인 굵은 철사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 위에는 레일 두 줄이 깔려 있었고 돌을 실어 나를 때 썼을 것으로 보이는 노란 외발 수레가 레일에서 벗어나 한쪽으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끝이 납작한 삽 한 자루가 역시 저 편할 대로 누워 있었다.
50가구는 집 크기와 구조가 모두 같았다. 진한 회색의 기와를 얹은 ㄱ자 모양의 집으로 안방과 작은방, 부엌과 장독대 및 화단으로 쓸 수 있는 공간과 작은 마당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집의 작은 방이 나란히 맞붙은 모양새였다. 두 집의 마당 경계와 마당을 두른 나무 울타리는 키 큰 아이들이나 어른이라면 너끈히 넘어 다닐 수 있을 만큼 낮았다. 물론 문을 두고 울타리를 뛰어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안방에서는 딱딱 화투장 맞추는 소리가 벌써 몇 시간째 이어졌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담배 연기가 부엌에까지 자욱했다. 엄마는 바다에서 따온 굴이며 꽃게, 낙지 등을 씻으러 길남이 아저씨네 우물로 갔다. 나는 바로 아래 남동생과 아궁이 앞에 앉아 엄마가 지펴둔 불을 쬐었다. 불이 꺼지지 않도록 아궁이 안으로 밀짚과 삭정이를 조금씩 밀어 넣었다.
“우리도 담배 피워보자.”
불붙은 밀짚 하나를 동생에게 건넸다. 동생이 깜짝 놀란 듯 쌍꺼풀 없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밀짚을 받았다. 나는 불붙은 밀짚을 하나 집어 들고 재빨리 입술 사이에 넣고 힘껏 빨았다. 머뭇거리는 동안 동생의 밀짚은 불이 거의 꺼지기 직전이었다. 그러자 동생도 나를 따라 서둘러 밀짚을 빨았다. 사그라지던 불꽃이 살아났다. 그러나 동생은 한 번 빨아본 밀짚을 인상을 쓰며 아궁이 안으로 던졌다. 나는 입안에 연기가 가득 차기도 전에 밀짚의 구멍을 통해 전해지는 열기가 혀 한곳에 집중되어 이미 데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한 번 더 밀짚을 빨았다. 그리고 입에 가득한 밀짚 담배 연기를 뱉었다. 혓바닥에 하얗게 밀집 연기에 덴 자리가 생겼다. 동생은 혀를 내두르며 기침을 했다. 안에서 아버지가 물었다.
“왜 그러냐?”
“아무것도 아녜요.”
밖에는 함박눈이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데 껑충거리던 바둑이들도 모두 집으로 들어간 뒤 동생과 나는 아궁이 앞에 앉아 밀짚 담배 피우기 외에 마땅히 다른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른들은 바다를 메워 땅으로 만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사나흘 돌무더기를 날라본 어른들은 말했다.
“어느 천 년에 바다를 메워 땅으로 만든단 말인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에 우리를 끌어들인 거여.”
“아부지 돈 벌러 다녀오마. 할매랑 엄마 말씀 잘 듣고 동생들 잘 돌봐라. 싸우지 말고 서로 양보하고. 니가 잘해야 동생들도 다 바르게 큰다이.”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때로는 20일에 한 번 정도 우체국을 통해 현금을 보내왔다. 도대리에는 은행은 물론 우체국도 없었다. 우체국은 장이 서는 마을까지 가야 있었는데 다녀오는데 한나절로는 모자랄 거리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자주 아버지께 안부 편지를 쓰도록 했다. 특히 돈을 받은 날은 반드시 돈 잘 받았고 아버지의 수고로 가족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편지에 써넣도록 주문했다. 할머니 역시 당신 아들에게 몸 건강히 지내라는 말과 당신은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안부를 주문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당황스러웠다. 사실은 글 모르는 엄마에게 말은 못 하고 한 번도 편지를 보낸 적 없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편지를 써야 할지 방법을 몰럈기 때문이다. 군인 아저씨께 위문편지 쓰듯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건 아닐 것 같았다. 아버지께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편지를 쓰려면 어떻게 써야 하지? 등등 열두 살 나는 아버지께 첫 편지를 쓰기 전 고민에 고민을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시작을 ‘아버지께’로 해야 할지 '아버님께'로 쓰는 게 맞는지, 누렇게 변색한 아버지의 책에서 본 대로 ‘아버님 전 상서’나 ‘아버님 전 상사리’로 써야 할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께'는 군인 아저씨께 보내는 편지와 너무 닮아서 제외시켰다. ‘아버님 전 상서’와 ‘아버님 전 상사리’ 두 가지를 앞에 놓고 하나를 고르기로 했다. ‘아버님 전 상서’가 읽고 호흡하는 데 매끄럽게 느껴졌다. ‘아버님 전 상서’라 쓰고 편지 양식에 맞춰 안부를 여쭙고 날씨 이야기를 드린 다음 본론으로 들어갔다. 본론이라야 보내주신 돈 감사히 잘 받았다, 가족들을 주욱 열거하며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 특히 엄마와 할머니 부탁이라며 한 줄 정도 더 써넣자 할 말이 떨어졌다. 끝이었다. 날짜와 내 이름을 쓴 다음 ‘올림’을 붙이니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가 뚝딱 완성되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말을 건 듯 지극히 의례적이고 간단한 편지였다.
동네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빨간 우체통에 아버지께 쓴 편지를 넣으면서도 그 편치 않은 마음은 뿌리내릴 자리를 찾지 못한 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편지를 받으시면 바로바로 답장을 주셨다. ‘오냐, 고맙다. 아버지랑 떨어져 지내도 언제나 바르게 잘 자라야 한다’. 평소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과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봄부터 가을 초입까지 아버지와의 편치 않은 편지 왕래는 이어졌다. 추석 무렵 아버지가 집에 들렀을 때 이웃집 조 씨 아저씨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천항에서 하역작업을 하고 있으며 집에 생활비 보내 주고도 아버지 사는 데는 지장 없을 정도 벌이는 된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짙은 구릿빛 얼굴은 여위었고 울퉁불퉁하던 팔의 근육도 몰라보게 줄었다. 이후 아버지는 명절이 아닌데도 며칠씩 도대리에 내려와 지내기도 했다. 다음 해 봄 우리 가족은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할머니의 푸념을 또 들어야 했다.
“갈 것도 아니고 안 갈 것도 아니었는디 아들이 잡어 끈다고 따라왔드만 여그 저그 한해살이 신세가 되야 부렀네. 인자 또 서울 가먼 믓을 해 묵고 살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