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청려장 아닌 명아주에 기대어

by 장미

아버지는 철거민촌에 정착한 지 두 해가 지날 무렵 집을 마련했다. 아버지가 집을 마련하기까지 그녀는 그녀대로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열무 장수는 그 닥치는 대로 했던 일 중 하나였다. 당시 우리는 그녀가 힘을 보태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절박했다. 짧은 기간에 집을 마련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무리가 따랐다. 임금을 제시간에 대지 못해 인부들이 몰려와 아버지를 다그치는 모습을 몇 번 목격했다. 아버지와 그 사람들이 다시 함께 일을 했던 걸로 봐선 어떻게든 임금 해결을 한 모양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한 일요일, 그녀는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점심때가 훌쩍 지나서 돌아왔다. 인기척을 느낀 내가 방과 부엌 사이 작은 미닫이창을 열었다. 그녀는 머리 위에 눈 속에서 보았던 솔가리 둥치만큼이나 큰 보따리를 이고 있었다.

“괜찮다. 나 한자 내릴 수 있어야.”

그녀가 부엌 바닥에 얼룩 투성이의 보따리를 부렸다.

“뭔데?”

“맹아주다.”


명아주였다. 그녀에게 학교는 학교였으나 명아주는 맹아주였다. 여름방학 숙제인 식물채집에 한 번도 빼놓지 않았던 명아주는 그녀가 알려주기 전 교과서에서 먼저 배웠다. 들판에서 자주 만나는 명아주에 대해서는 잎과 줄기, 꽃이 필 무렵 모양새 등에 대해 알고 있었을 뿐 나물로 이용하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세모꼴의 명아주 잎은 가장자리가 가지런하지 못하고 벌레가 뜯어먹은 듯도 하고 이가 빠진 듯 우둘투둘한 불규칙한 톱니 모양을 가지고 있다. 줄기는 각진 모양에 각진 자리를 따라 붉은색으로 가느다란 줄을 그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새 순에는 하얀 가루가 특히 많이 묻어 있는데 손가락 사이에 넣고 문지르면 소리 나지 않는 고운 사포 가루 같은 촉감이었다.


그녀가 명아주를 삶으려는지 솥에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따로 연탄아궁이가 있었으나 여름이 가까워 오면서 연탄도 아낄 겸 필요할 때는 장작을 쓰곤 했다. 말이 장작이지 실은 그녀가 여러 공사장에서 주워온 각목이 대부분이었다. 솔가리만이 땔감이 전부였던 그녀에게 많은 여유가 생긴 것만은 사실이었다. 부엌은 도대리로 내려가기 전 살았던 자갈판의 그 집과 같이 깊었고 방과 부엌 사이에 나 있는 작은 문은 미닫이로 변했을 뿐 여러 가지가 비슷했다. 집은 이래야 편하다는 아버지의 도면에 따랐을 터였다.


“명아주를 먹어?”

“그라믄. 삶어서 몰롔다가 다시 물 붓고 뿔례서 노물 무쳐 놓으먼 묵을 만해야.”

“근데 이렇게나 많이? 날도 더운데 어디까지 갔다 왔어?”

“이, 삶어서 몰리먼 을마 안 되야야. 그라고 이 놈은 오늘 시장에 내다 폴 것이다. 쩌그 밤댕이 짝 산 아래가 묵정밭인디 아조 맹아주 천지드라야. 사정없이 뜯어 왔다.”





나는 열무 밭에서 비를 맞던 지난해 여름 어느 날을 생각했다. 열무 다발을 담았던 그 양은 대야에 그녀가 오늘은 명아주 나물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저 대야에 열무를 담았다가 명아주를 담았다가 내일은 또 무엇을 담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이 끓었다. 몇 해 전 이른 봄이면 황새냉이와 물쑥 뿌리를 데치던 그녀가 거기 아직 있었다. 그녀가 찬장에서 작은 봉지를 꺼내더니 솥뚜껑을 열고 봉지의 가루를 끓는 물에 조금 뿌려 넣었다. 그 물에 양은 대야에 담겨 있는 명아주를 두 손아귀 가득 집어 끓는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재빨리 뒤적거렸다.

“뭔데?”

“소다여 소다. 노물 삶을 때 이놈 넣으먼 색이 더 푸랗게 살아나야. 뻣신 놈은 부드럽게도 되고.”

“......”


나는 그녀가 하는 양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잇날에는 임금님이 나 많은 노인들한티 맹아주 지팽이를 하사도 했단다. 맹아주를 거름도 줘감서 아조 굵게 키와 갖고 옆에 잔가지들하고 잎사구는 다 처 내불고 이렇게 물에 삶어서 몰리고 다듬으먼 노인들 의지할 만한 좋은 지팽이가 된단다. 임금님이 노인네들 아프지 말고 사시라고 하사하셨겄제이.”

그녀는 명아주 삶을 때 소다를 넣는다거나 명아주 지팡이가 있다는 등의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녀가 나물 삶을 때 소다를 넣으면 새파랗게 삶아진다는 원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굵은소금을 넣고 나물을 데치던 몇 해 전보다 더 놀라운 방법을 알게 된 그녀가 신기하기만 했다.


“아부지가 식구들 믹에 살릴라고 저렇게 애쓰는디 나라도 심 보탤 수 있을 때 보태야제. 이 봄에 아부지 얼굴이 살도 겁나게 빠지고 끄매져 부렀드라. 그래도 니 전학증이 와서 학교를 댕긴께 을매나 다행인지 모르겄다. 느그 아부지 느그들 전학증 땀시 지녁마당 아조 피가 몰랐드란다. 당신이 공부를 다 못 마쳐서 그라겄다 싶음서 나라고 으째 아부지랑 같은 맴 아니었겄냐. 으짜든지 공부 열심히 해라.”


그녀가 명아주 나물 대야를 이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는 뒷모습을 서쪽으로 난 창을 통해 오래 바라보았다. 저렇게 열심히 살려는 그녀가 도깨비 고개를 넘어오던 밤에 그 두려운 어둠 속에서 내게 던졌던 그 말은 내게 무슨 의미일까. 원수 같은 년. 니가 내 원수다. 너만 안 생겼더라면. 이 징한 시상을 믓하러 살 것이냐.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순간 또 머릿속이 까매졌다. 그녀가 안 보일 때가 되어서야 창에서 돌아섰다. 가끔 마음 어딘가에 생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사금파리로 긁어대는 듯한 유쾌하지 못한 느낌들이 찾아와 오래 머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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