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털어놓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대상이 나를 낳고 키워준 사람이라면 더욱 행복하다.’ 어디선가 읽었던 말일 것이다. 마음에 평온과 여유를 지니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은 행복이나 사랑 등 그 관념적 명사를 스스로에게 적용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나는 나를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오랜 기간 그랬다.
내가 그녀라는 책을 덮어버린 이후 그녀는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2년과 2주를 더 살았다. 신께서도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선택을 지켜보시는 외에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장 씨 집안에 들어와 산 지 10년이 되어서야 장 씨 집안 귀신이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혼인신고. 그 허락서에는 후에 '제적'이란 도장이 박힌다. 이것이 그녀가 이 세상을 다녀갔다는 증거다. 제적. 누구나 세상을 떠나면 그런 도장을 받는 것이라는 말에 적어도 아직은 동의하고 싶지 않다. 내 동의와 상관없이 생의 어느 순간부터 매 순간이 화인(火印)이었을 그녀는 이 별에 제적이라는 도장 자국을 남겨두었다.
그녀라는 책을 덮은 이후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관심을 접었으므로. 그녀는 묻지 않는 내게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그녀는 내게 물은 적 없고 내가 알려준 적도 없는 나에 대해 속속들이 모르는 게 없었다, 엄마였으므로.
내가 세상에 오기 전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에 매우 충실한 여자였다. 그녀의 매우 충실한 역할 중에는 나를 이 세상으로 인도하는 역할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딸이 되어 세상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녀와 한 무대 위에 섰다. 나는 그녀에게 한때 살가운 딸이었다. 그러나 대본은 내게 돼먹잖은 딸 역할을 주문했다. 자신의 역할에 매우 충실한 그녀의 안내로 세상에 온 나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그녀를 닮아 돼먹잖은 내 역할에 지극히 충실했다.
역할을 끝낸 그녀는 그녀 자리로 돌아갔다. 오래도록 지나치게 내 역할에 충실한 나머지 나는 연극이 언제 끝났는지 여전히 진행 중인지 한 동안 구분할 수 없었다. 손에 잡히는 것마다 그녀였고 잡힌 그녀마다 헛것이었다. 한 무대에서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이제 내 돼먹잖은 역할은 끝났으며 그건 오직 연극이었을 뿐이니 용서하라고 어둠 속을 헤매며 어둠 속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내가 그렇게도 남발하면서 그녀와 나 사이에는 한 번도 적용시키지 못한 사랑한다는 말은 여전히 목구멍에 걸린 채다.
그녀는 겪어보지 않은 것 중 하나 남은 유일한 죽음을 만나러 떠났다. 그녀가 만난 죽음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다. 얼마 간 그녀 없이 나 혼자 무대를 지키는 것도 대본에 있는 나의 역할이다. 그녀 말대로 다 괜찮다, 괜찮아졌다. '니가 내 원수다, 너만 안 생겼으면 이 징한 세상을 뭣 때문에 살겠냐."는 말이 내게는 해석 불가능한 외계의 말이었음을 알았다. '니가 내 원수다. 나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다.'라고는 왜 한 번도 해석해 볼 생각을 못했을꺄..
그녀가 세상을 놓은 지 15년이 흘렀다. 그녀라는 책을 펼쳤다. 언제나 울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책장마다 웃고 있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정독하기 시작한 그녀의 이야기를 생각보다 빨리 읽었다. 그녀가 없는 어둠 속 무대 위에서 그녀의 지도 없이 내 멋대로 대본을 읽는다. 엄마, 사랑해. 그녀는 사라졌고 메아리도 떠났다.
그녀를 비롯한 세상이라는 마당에서 제적되어 버린 이들을 위해 두 손을 모은다. 내 손안에 들어와 안기는 많은 이름 모르는 이들을 위해 눈물 한 방울 떨군다. 이는 언제가 그들처럼 세상에서 제적되어 당신의 발밑을 받치고 있을 나를 위한 눈물이기도 하다. 어느 아침 조용한 풀숲 이슬방울이 내게 그랬듯 나 또한 당신 눈에 또 다른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괜찮은 렌즈, 이슬방울로 승화하기를 바란다.
그 여자는 내 가장 오랜 동성 친구였다. 내가 내 딸들에게 그러하듯이.
한 송이 꽃이 졌다.
점례.
나를 살린 한 마디 - 괜찮다
머뭇거리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괜찮다
말을 해 봐라
말보다 눈물이 먼저 입 꼬리로 흘러들었다
첫날밤에도 사랑받지 못했을 것 같은
그녀 앞에서 철들고 처음 눈물을 보였다
눈물은 짜고 쓰고 달았다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이 따뜻했다
세월의 무두질에 부드러워진 혀로
분출하는 딸의 용암과 화산재를
그녀는 남김없이 핥아먹었다
니가 내 원수다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았던
열한 살 이후 쌓아 올린 벽이
무너지는 소리는 투명했다
비로소 어머니 속 여자가 하는 말이 또렷해졌다
너만 없었으면 진즉에 버렸을 세상
니가 있어 나 오늘도 살아냈다
죽음 말고 내가 안 겪어 본 게 뭐가 있겠냐?
그녀의 아수라장 인생을 찰나처럼 훑었다
다 말해 봐라
괜찮다
신의 말씀이었다
-끝-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