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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샤 Apr 18. 2024

이터널 선샤인, 2005

공포스럽게도, 같은 선택을 다시 하게 된다는 것.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  #미셸 공드리 Michel Gondry



이터널 선샤인은 지금까지도 인기 있는 명불허전 스테디셀러다. 

이것도 본 지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네 ㅎ

라라랜드와 마찬가지로 예준이와 함께 봤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2년 전 독서모임의 발제를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대면으로 하는 크리스마스 모임을 위해서 꽤 집중해서 보고 

타임라인에 따른 다른 분들의 해석도 찾아봤었다. 

그 당시 미리 보고, 같이 보고, 

이번까지 총 3번을 봤다. 


이번에는 특히 다른 플리들의 반응을 보면서 역시 인간은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한 번도.. 

그들의 성생활과 직업윤리 따위를 갖다 버린 모습에 초점을 두지를 않았었기 때문에 

다들 웅성거리며 문화적으로 안 맞는다는 의견들을 올리는 것을 확인할 때 재밌었다. ㅎ


어쨌든 내게 이 영화는 공포스럽다.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한다는 것. 

또다시, 같은 사람에게 끌리는 것. 

낭만이고... 나발이고

그냥 공포 영화다.


"비슷한 사람에게 끌림 vs. 다른 사람에게 끌림"은

오래된 논쟁이지만, 

나는 인간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고 느껴질 때 서로에게 끌린다고 생각한다. 


기억을 아무리 지워도, 

그 기억을 지우기 이전까지의 나는 변화하지 않기에 

같은 선택을 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또, 기시감(데자뷔 Déjà vu, 경험하지 않은 것을 경험한 것처럼 느끼는 것)도 반복해서 느끼겠지. 

실제로는 기시감이 아니라 경험한 것이기에, 

그리고 뇌의 뉴런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완벽히 기억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학습해서 뉴런 간 연결이 생겼던 것은 다시 연결이 생기거나 강화되기도 쉬우니 말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라쿠나사에서 기억을 지우는 상대와 관련된 것을 모두 치우라고 하고, 

주변인에게도 언급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낸 것이니 말이다. 


누군가에겐 운명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그냥..

공포스럽다. 


운명이.. 로맨틱한 단어로 들린다면,

그것은 "운명, 사명, 업, 업보, 길"이란 이름 하에 

겪는 일들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원망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운명적인 그것들을 위해서 

나의 삶이 이렇게 흘러왔다.'


마법의 접두사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문장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온점을 찍어주기엔 공백이 너무 많은 문장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갖게 될 의문은 

"나라면, 힘들게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시 같은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일 것이다. 


내게 이 영화가 공포스러운 이유는 이야기가 너무나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연인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삶의 여러 갈래의 선택에서 

나는 내가 다시 그 선택을 할 것을 알고 있다. 


그 상황에서 그 정도의 정보 수준으로는 분명히 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같은 학과를 선택할 것이고,

다시 임상을 할 것이고,

그 교수를 선택할 것이다. 


미래의 내가 하는 말이 녹음된 카세트 따위

알고 있으니,

들었으니,

이번에는 다르게 해 보겠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은 

어리석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개인의 세계에서

원래 하던 선택이 아니라

그 순간에 다른 옵션도 있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냥 있는 말이 아니다.


심리 치료의 핵심은 개인의 삶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확인하고 

다른 상황임에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즉, 비슷한 상대나 상황처럼 느껴지지만, 

매번 다르다는 것을 인식시켜서 변화할 수 있게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일어날 것 같은 일과 관계처럼 생각되지만,

인간은 각자가 다르고

무엇보다 시간과 경험에 따라서 변화함을 치료 중에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동일해 보이는 "나의 선택"도 동기와 기대하는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항상 나선형으로 인생을 비유한다. 

멀리서 보면 같은 자리를 도는 것 같지만,

층이 바뀌고 있고, 빙빙 돌지만, 중심을 이어 보면 선형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이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닌가. 

변한 것은 상대만이 아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 모두 

서로를 가장 사랑했던 부분에 가장 질리게 된다.

사랑의 이유였던 것이 참는 이유가 되는 순간에 헤어질지 말지 저울질이 시작되지 않나. 


이 영화는 이 순간 특별한 가정이 추가된다.

이제는 끔찍해진 시간을 원한다면 지울 수 있다. 

지울 것인가?


영화를 보면 조엘이 클레멘타인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더 깊은 기억으로 숨어가면서 도망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그가 클레멘타인 싫어진 이유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이유와 같았음을 깨닫는다.

끔찍한 기억이 아름다웠던 기억과 떨어질 수 없음에 기억을 지우려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것이다. 


서로를 보는 관점이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자신이 변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주 소수의 커플들은

이렇게 참아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대상을 만나기도 하고,

콩깍지가 벗겨지더라도 

아니, 콩깍지를 계속 새로 껴가면서 

사랑을 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은 귀한 능력이자 축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게 운명이겠지. 


내게는 영화의 커플과 위의 소수의 커플에게 적용한 운명의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서

정의를 찾아봤다. 


운명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이다.


운명은 영어나 국어 모두에서 

죽음과 연결된다.

fate는 특히,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fatal은 목숨에 위협적인 것을 의미하며,

한국어에서 운명은 그 자체로 죽음을 뜻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운명을 destiny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피할 수 없는 목적지 destination로, 

참고 견디며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수단으로써 활용하는 느낌이다.

calling처럼 부름을 받은 소명으로써 운명을 생각하는 게 

힘든 삶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일까 생각한다. 


둘 다 정해진 운명을 의미하지만,

어떤 정의를 선택하는지에 따라서 인상이 달라진다. 


내게 운명이 공포스러운 것은 

fate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나의 통제력이 사라진 느낌이랄까. 


죽음처럼 필연적이라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왜 열심히 살아야 하나?

어떻게든지 흘러갈 텐데.


운명이고 뭐고

힘든 일이 있으면 그릇이 커지거나 

액땜이거나 그 후에 더 나아질 것이고 뭐고

그냥 나아지고 싶다. 


나는 부처도 아니요. 

그저 몸부림치는 중생에 불과하니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종교도 없고 그나마도 학문적 수준의 관심뿐이지만,

현대의 심리학은 그냥 불교같이 느껴진다. 


최근의 인지적 심리치료 기법은 모두 불교에서 따온 마음 챙김과 수용으로 귀결되니까 말이다. 

3세대 CBT가 아니더라도, 어떤 기법이라도 그러한 느낌이랄까. 

인기 있는 긍정심리는 더 그러하고 말이다.

심리학을 전공했던 나는 생각이 언제나 그 방향으로 튀는 편이다. 


종종 생각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에 사는 서양인들에게 이러한 내용은 새롭겠지만, 

우리는 원효대사의 해골물이 교과서에 실리는 국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처럼 요가나 호흡법에 광적으로 빠지지도 않고, karma나 인연이 생소하지도 않다. 


게다가 문과였기 때문에 윤리와 사상을 배웠는데 장자와 노자까지 거치면 

그냥 김은숙 작가의 도깨비를 보며 눈물 흘리고, 

감탄하는 게 1시간에 10만 원짜리 심리치료를 받는 것보다 나은 거 같기도 하고 ㅎ

아니면 그냥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렇게 통찰을 혼자 얻는 것이 힘들고,

개인적인 고통이 커서 치료를 받는 것이지만, 이론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예술이 인간과 함께 발전해 온 이유가 아닌가. 

이 영화도 아름다운 미장센과 

주인공들의 관계에 따른 머리색의 변화와

놀라운 연기,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나타내는 재밌는 방식이라 그렇지

특별한 물음을 던지고 있지는 않다. 


그저 항상 하는 질문이지. 


"끔찍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지울 것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아마 그래서 스테디셀러가 된 것일 테다. 

뻔한 질문을 뻔하지 않게 재밌게 하니까. 


ps.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클레멘타인의 머리색과 관계의 변화를 눈여겨본다면 즐겁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한테 이따위로 말하는 거 정말 싫다."



"제발 이 기억만큼은 남겨 주세요, 이것만큼은..."  



"난 이상형이 아니야, 조엘. 그냥 마음의 평안을 찾는 빌어먹을 소녀일 뿐이야.."



"전에도 그랬었으니까"



"난 네가 괴짜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넌 들떠 있었던 거야."

...

"도망가지 말고 이번엔 나랑 같이 있자."



"지금 그쪽 모든 게 맘에 들어요."

"지금이야 그렇죠. 그런데, 곧 거슬려할 테고 난 당신을 지루해할 거예요."

"okay"

"okay"

"okay"



"가장 잊고 싶은 기억이, 모순적이게도 가장 간직하고 싶은 추억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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