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합천 어디라고?"
"합천테마파크."
네비게이션 추천 경로를 찍고 고속도로 위로 진입할 때쯤 아내가 말했다.
"잉, 한 시간 반이나 걸리네? 어제 지도 봤을 땐 한 시간밖에 안 걸렸던 거 같은데."
갈 길이 절반 정도 남았을 때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국도로 빠졌다.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우뚱거렸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는데 마땅히 세울 만한 휴게소가 국도엔 없었기 때문이다.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신호등도 귀찮았다. 백미러를 힐끔 보니 아내는 자고 있었다. 안전을 생각하면 아내를 깨웠어야 했는데 괜한 고집에 창문 열고 환기시키는 걸로 겨우 버텼다. 그렇게 거의 반송장처럼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 여기 어디야?"
'아니겠지, 설마'
아내의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이미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애써 침묵을 지켰다.
"여기 합천 대장경 테마파크 아닌 것 같은데..."
"아까 분명 '합천테마파크'라며."
"대장경은 여기서 한 시간이나 더 가야 돼."
"한 시간?"
사실 도착하면 아내 먼저 보내고 10분이라도 눈을 붙일 셈이었다. 하지만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 무려 한 시간이나 떨어져 있다는 걸 듣고는 잠이 확 달아났다. 고개는 중력에 저항하는 걸 포기한 듯 절로 숙여졌다. 이마가 핸들 위에 닿자 팔에 힘이 풀렸다.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예매한 티켓과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아내 친구 가족들이 떠올랐다. 일이 꼬이려니 참 희한하게도 꼬인다고 생각했다.
결국 예매한 티켓은 취소하고 아내 친구와는 각자 따로 놀기로 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대장경 뭐시기가 아니라, '합천 영상테마파크'였다. 드라마와 영화 세트장이 설치된 곳이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 아이가 유모차에 얌전히 앉아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아, 나도 몰라. 그냥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다. 일단은 즐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받아들이기로 하고, 가라앉은 기분을 멱살 잡고 끌어올리며 티켓을 끊고 입구를 지났다.
촬영 세트장은 가본 적이 있어서 큰 기대는 없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다닐 만했다. 옛날 감성이 여기저기 짙게 배어 있어 사진 찍을 곳이 많았다. 더빙과 이색 사진 체험도 재밌었다. 외관이 화려한 건물들의 입구가 자물쇠로 채워진 곳이 많은 게 조금 아쉽긴 했다. 그래도 잘못 온 것치고는 꽤 흡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가는 길, 다시 국도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 네비게이션에 '고속도로 위주' 옵션을 눌렀다. 집에 도착했을 땐 분명 세 시였는데 아이 기저귀 갈고, 설거지하고, 분리수거 하고 왔더니 어느새 시침은 네 시에 붙어 있었다.
"들어가서 좀 누워."
망설였다. 글을 쓸지 침대에 누울지,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반틈도 차지 않은 분리수거함을 비운 것도 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였다. 지금 글 쓰러 나간다고 하면 아내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잘 수는 없었다. 노을이 지기도 전에 잠들면 다음 날 새벽기상에 지장이 있을 게 뻔했다. 연휴가 길고 명절에 바삐 돌아다닐 곳도 없지만, 어떤 핑계로든 글을 쓰지 않으면 기분이 영 찜찜할 것 같았다. 내 몸이 피곤한 것보다 그게 더 싫었다.
"나갈까 말까..."
"오늘 새벽에 안 나갔어?"
"나갔지, 달리기도 하고 왔는 걸."
"여보, 그러다 죽어."
설마 죽기야 하겠냐만은 상당한 피로가 누적돼 있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었다. 만약 이성에 실체가 있었다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꽁꽁 묶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안 나가면 심적으로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하루 1,000자 이상 쓰는 게 목표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하면 1,000자는 눈 깜짝할 새 넘어간다. 세어본 적이 없어서 하루에 얼마나 글을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얼만큼 써야 만족하는지도 모르겠다. 백스페이스로 지운 글자 수까지 감안하면 대략 일 평균 5,000자 정도는 쓰는 것 같은데, 그마저도 부족하다.
강박관념, 완벽주의, 지나친 자기검열, 의욕 과잉 같은 말을 나는 받아칠 자신이 없다. 스스로 제정신이라 믿고 싶지만 이럴 때면 마음이 흔들린다. 내가 뭐 대단한 작가도 아니고, 굵직한 작품을 쓰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무슨 글을 쓸지도 정해놓지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필요는 없는데.
근데 이미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이 돼버렸다. 하루종일 쓴 글이 성에 차지 않아 모조리 지우는 한이 있더라도 뭐라도 써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 말이다. 주제 넘게 까불다가 방전될까 봐 겁은 난다. 하지만 글쓰기는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죽을 때까지 하기로 한 일, 나의 정체성과도 같은 일. 내 안에 스민 모든 것들을 기록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끝까지 가볼 작정이다.
이대로 가다 고꾸라질 수도 있고 기적처럼 날아오를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겸허히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 방향만 어긋나지 않는다면 끝이 어떻든 간에 담담히 웃어넘기지 않을까.
그저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다. 이런 무모한 나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