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와는 담 쌓고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던 시절에도 결혼 생각은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다. 존경스럽지도 않은 상사에게 고개 조아리며 비위를 맞추고, 쥐꼬리만한 월급 받아가며 주말 없는 생활을 감내한 건 다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어중간한 곳에서 적당히 벌었다가는 가족을 책임지지 못할 것 같았다. 몸이 좀 고될지언정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월 300만 원 이상은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월 300만 원 이상 벌면 물론 좋지만, 꼭 그만큼 벌지 않아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걸 요즘 들어 실감하고 있다. 결혼하기 전엔 한 번도 못했던 생각이었다.
우리 부부는 각자 세후 월급이 300만 원 미만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 정도 수입으로는 저축은커녕 평범하게나 살 수 있을지 걱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그 정도 수입 안에서도 여유는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가계부를 쓴다거나 일일이 전기선을 뽑거나 하는 식의 절약은 필요 없었다. 생활비, 저축비, 투자비 등으로 나눠 월급통장에 자동이체를 걸어둔 것만으로도 족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돈을 크게 쓰지 않는 편이다. 아내는 명품에 관심 없고 나는 독서와 글쓰기말고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돈보다는 귀찮은 마음에 외식은 거의 염두에 두질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쯤 배달 음식 시켜먹는 게 우리 부부에겐 소소한 일탈이다. 옷은 정가에 사는 법이 없다. 이월 상품 혹은 핫딜이 아니면 장바구니에 담지 않는다. 우린 양가 부모님에게도 생일 말고는 별도의 용돈을 드리지 않으며, 모든 기념일은 함께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한 번은 700만 원 가량의 성과금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명품이나 해외 여행을 알아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난 마치 날아오는 공을 부드럽게 넘기듯이 부부통장에 이체하고 말았다. 그 외 상여금, 명절 보너스, 생일 축하금, 결혼 축의금 등도 마찬가지였다. 늘 하던 대로, 기계처럼 이체하고는 금세 잊어버리곤 했다. 난 책 말고는 사고 싶은 게 거의 없었다. 매달 들어오는 용돈 20만 원도 다 못 써서 저축통장에 보탤 정도였다.
관건은 소비였다.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경제적 부담은 현저히 줄고 생활은 한결 가벼워졌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나도 사람인지라 좋은 차, 넓은 집, 명품 옷이 아예 부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은근히 탐고 났고, 준다면 넙죽 받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내 것'이 된다 한들, 그 짜릿함은 곧 스쳐 지나갈 것이고 금세 또 다른 걸 원하게 될 것이다. 그런 패턴이라면 살면서 수없이 겪어왔다. 나는 더 이상 그 악순환에 갇히고 싶지가 않다.
해외 여행이 동네 산책보다 '더' 좋은 건 아니었다. 각자 다르게 좋은 것이었다. 자격증 따는 것보다 대기업에 취직하는 게 '더' 기쁜 건 아니었다. 각자 다르게 기쁜 것이었다. 해외 여행? 멋드러진 휴양지에서 실컷 놀아보고 싶지만, 그만큼 피곤할 테고 오래 머물수록 집 생각이 더 날 것이다. 대기업? 남부럽지 않은 연봉과 복지를 누릴 수 있겠지만, 받고 누리는 만큼 회사에 뭔가를 바쳐야 할 것이다. 모든 일엔 늘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
결핍을 소비로 충족하는 버릇은 경제적 파탄을 불러온다. 세상은 하루가 멀다하고 기깔나는 제품을 만들어 내지만, 편리한 물건은 전에 없던 불편함을 창조한다. 식기세척기 없이도 잘만 지내던 사람이 밥그릇 하나 씻는 것도 귀찮아하는 것처럼. 로봇청소기 없이도 잘만 지내던 사람이 방바닥 청소는 엄두도 못 내는 것처럼.
물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지만 월급은 대체 오르기나 하는 건지 의문이다. 애석하지만 그런 흐름이 불만이라 한들 개인이 어찌할 도리는 없다. 그저 순응하고 사는 수밖에.
사람들은 너무 많은 걸 사들인다. 눈길을 끄는 할인 문구는 예정에 없던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밀어넣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집 앞에는 택배 박스가 쌓인다. 정말 필요한가 하는 문제는 늘 뒷전이고, 사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위로가 된 듯하다. 주변에 연봉이 높을수록 저축은커녕 빚 갚느라 허덕이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서, 얼마를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돈 버는 자랑은 확실히 할 게 못 되는 것 같다. 버는 만큼 쓰면 그게 뭔 소용이랴.
내 삶의 난이도가 부쩍 낮아진 건 욕망을 돈으로 채우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책 읽고 글만 쓸 수 있다면 난 더 바랄 게 없다. 돈보다는 시간이, 내겐 훨씬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