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을 쓴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대표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선임, 아이는 잘 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세한 소름이 끼쳤다. 대표님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걸 물어보는 분이 아니었다. 서울 본사에 계시는 대표님을 직접 뵌 건 단 한 번뿐이었고, 업무적인 대화 말고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남자직원 중에서 육아휴직을 처음 쓴 게 나여서 근황이 궁금했을까, 생각해봤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로 전화한 거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무미건조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놔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고이 흐르던 시간선이 멈춘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역시나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대표님의 용건은 바로 권고사직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시기가 너무 빨랐다.
사실 그 회사는 내가 들어갈 수 없었다. 환경공학 전공에 관련 기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 채용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회사가 내가 사는 지역의 한 대기업과 장기 프로젝트 협약을 맺으면서, 인근 아파트를 매입해 사무실을 차리게 되었고, 그곳에 광주 센터 직원들을 파견해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도면 설계자를 급히 찾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돈은 많이 주지만,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주물공장에서 벗어나 사무직으로 옮기려던 참이었다. 그때 그 회사의 채용 공고가 눈에 들어왔고, 나는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듣도 보도 못한 회사라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9 to 6' 근무에 빨간 날은 모두 쉰다는 조건만으로도 충분했다. 막상 면접을 보고 나니 급여 체계와 수준이 괜찮았고 복지도 기대 이상이었다. 게다가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였다.
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대기업과 계약이 끝나면 어쩔 셈이지?'
"아유~ 일거리는 계속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시 면접관이던 팀장님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거듭 반복하며 내게 말했다. 썩 신뢰가 가는 관상은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지만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땐 이직이 정말 간절할 때였다.
허름한 아파트를 말끔하게 리모델링한 걸 보니 거짓말 같진 않았다. 직원 네 명이 각자 방을 쓸 수 있도록 안방에는 가벽을 세워 공간을 나눴고, 거실까지 포함해 천장형 에어컨만 다섯 대가 설치돼 있었다. 새 냉장고와 커피 머신, 무선청소기, 신호집에서나 볼 법한 대형 벽걸이 TV까지 갖춰진 모습도 제법 그럴듯했다. 그 모든 걸 대표님이 직접 준비했다던데, 직원 업무 환경에 꽤나 신경 쓴 흔적이 느껴졌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일이 끊기기는커녕 오히려 이 프로젝트가 끝나긴 하는 걸까 의심이 들었다. 업무 하나를 끝내기도 전에 두세 개가 연달아 치고 들어오는 격이었다. 할 일은 날이 갈수록 곱절로 불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직원 두 명이 버티지 못해 결국 연달아 퇴사했다. 사무실엔 팀장님과 나뿐이었다. 인원을 어찌 보충할까 궁금했는데, 채용 공고만 올릴 뿐 정작 사람 뽑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신기한 건 경력자가 두 명이나 빠졌음에도, 이제 막 수습 딱지를 뗀 신입사원과 팀장 둘이서 어찌어찌 일이 진행되는 점이었다. 팀장님은 의외로 책임감이 강했고, 무엇보다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렇게 2년하고도 몇 개월이 좀 더 흘렀다.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일도 어느덧 하나둘씩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무실에 출근해도 딱히 할 일이 없어 팀장님과 잡담을 나누거나 책을 읽기도 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일단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여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반면 팀장님은 직급이 직급이다 보니, 겉과 달리 속은 많이 조급한 것 같았다. 할 것도 없으면서 괜히 현장을 기웃거리고, 어떻게든 일거리를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웃는 모습이 편해 보이지 않았다.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즈음 아내가 임신했다. 팀장님은 날 배려한다며 일찍 퇴근을 시켜줬지만, 실은 딱히 할 일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한편, 2025년부터 아내의 육아휴직 기간을 1년에서 1년 6개월로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조건은 배우자인 내가 3개월 이상 육아휴직을 써야 하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 창립 이래로 남자직원이 육아휴직을 쓴 전례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업무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육아휴직 기간을 연장하는 게 목적이잖아. 만약 안 된다 그러면 재택근무 얘기라도 꺼내 봐."
좋은 생각이었다. 아내의 제안이 왠지 먹힐 것 같았다. 비록 대체자는 없지만, 업무 특성상 노트북만 있으면 집에서도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급한 일이 생기면 노래 한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착하는 사무실에 갔다 오면 될 일이었다. 그래도 회사 입장은 또 다를 수가 있으니, 나는 거의 편지에 가까운 보고서를 작성했다. 업무 대체자가 없음에도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이유와 향후 대체 방안이 상세하게 적힌 A4 용지를 팀장님에게 건넸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팀장님의 모습을 보며 긴장이 조금씩 풀려갔다.
"음, 그래. 일단 나는 괜찮은 것 같다. 오늘 중으로 대표님께 한번 말씀드려볼게."
그로부터 며칠 후 대표님의 승인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서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쓴 남자직원이 되었다. 갓난아기를 돌보느라 정신없겠지만, 석 달간의 휴가를 얻은 듯한 느낌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그 절반도 채우지 못해서 퇴직 권유를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일거리가 완전히 끊긴 건지, 대기업이 다른 업체와 계약을 맺은 건지, 아니면 대표님 말대로 정말 본사 사정이 안 좋아진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몇 년간 매일 출근하던 사무실이 하루아침에 폐쇄되었다는 점이다.
우선 팀장님을 원망했다. 면접 때 분명 "야근은 없다", "일거리는 계속 있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단언했지만, 결국 둘 다 사실이 아니었다. 물론 팀장님 본인도 그렇게 믿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도 내부 사정을 모르는 지원자에게 뚜렷한 근거 없이 확신을 준 건 생각할수록 무책임해 보였다.
그런데 얼마 후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지러 갈 게 있어 사무실에 잠시 들릴 때였다. 팀장님은 폐쇄 전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었고, 잠시 쉬고 계셨는지 들어갔을 땐 소파에 묻히기라도 할 것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너는 그나마 젊어서 다행이다. 나보다는 갈 데가 훨씬 많으니까."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컴퓨터 활용이 조금 서툴 뿐, 일머리가 좋고 책임감이 강한 분이었다. 소통이 어렵다며 담당자 교체를 요구하던 거래처 직원도 나중엔 팀장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게다가 팀장님은 대표님의 대학 동기였다. 그날 이후 원망은 어느새 연민으로 바뀌어 있었다.
3년 동안 티격태격하며 마냥 사이좋게 지내진 않아도, 서로에 대한 존중은 잃지 않았었다. 함께 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미운정도 들고 호흡도 점점 맞춰가고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다가올 끝이 조금은 더 분명하고 의미 있었으면 했는데. 아무리 사람 일은 모른다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릴 줄은 정말 몰랐다. 갈등도, 감동도 없이 이도 저도 아닌 채 흐릿하게 흩어져 버린 마무리는 씁쓸하면서도 묘한 바람을 마음에 불러일으켰다.
'세상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나'
한편,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기분이었다. 내가 좀 이상했다. 너무 이상하지 않아서 이상했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회사에서 잘린 사람치고는 상태가 너무 멀쩡했던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육아휴직이 끝나면 복직할 곳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대표님에게 부탁해 육아휴직 기간을 6개월로 연장하긴 했다만, 겨우 그 정도로 이렇게 평온할 수는 없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정황상 돈을 더 벌어와도 시원찮을 판국에 남편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된 게 별일 아니라는 듯, 어차피 이렇게 되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오히려 앞으로 더 좋은 곳으로 가게 되리라는 걸 확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상황이면 불안한 게 맞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이상해. 뭔가 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우린 알면 알수록 성향이 많이 달랐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자석의 S극과 N극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너'와 '나'의 속을 들여다보면 분명 다른 모양일 거라고 늘 생각해왔는데, 이번만큼은 마음 깊은 곳까지 같은 기분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살다 보면 일은 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육아휴직이 끝나자마자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고,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곳에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 꼭 처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부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