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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Jun 29. 2024

내 열정을 박살 내버린 아내

그녀를 통해 인생을 돌아보다


한날 독서모임을 진행하다가 '열정'에 대한 화두가 올랐다. 참여자 중 한 분이 열정이 끓어오르지 않아서 고민이라고 하였다.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열정? 열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아내가 생각났다. 아내는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열정이라곤 티끌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열정이 있어야 무조건 좋은 거라고 생각했을 테다. 그래서 열정이 없다면 어떡해서든 열정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열정이 있으면 있는 대로 좋겠지만,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장점도 있다고 본다. 아내를 보면서 그런 걸 많이 느꼈다.




난 20대 초반부터 부지런히 뭔가를 계속해서 했다. 헬스도 하고 수영도 하고 친구들도 꾸준히 만나면서 연애도 했다. 한 손엔 책도 항상 들고 다녔다. 특히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었다. 그땐 그래야 성공한다고 믿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니는 회사마다 열정을 태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괜히 나댔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떠안은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게 일종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직할 땐 힘든 일을 골라서 찾아갔다. 건설현장에서 기술을 배운 적도 있었다(소위 노가다). 평범한 회사는 아예 알아보지도 않았다. 좀 더 열정적인 일을 해야 뭘 해도 잘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 일은 맘처럼 되는 게 없었다. 열정을 태우기엔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벽들이 너무도 많았다.


아내는 그런 나와 달리 열정이 없다. 적당히 살아가는 법을 통달한 사람만 같다. 쉴 땐 잠만 잔다. 책도 가끔 읽는다. 삼시세끼를 꼬박 챙겨 먹는데 대충 챙겨 먹는 일이 드물다. 직장생활도 한 곳에서 10년 가까이했다. 나처럼 괜히 으스대는 일은 결코 없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면 굳이 도맡아서 고생하려 하지 않는다. 상사에게 할 말이 있으면 당당하게 하고, 직장 동료들과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지 않는다.


난 시간이 남으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지만, 아내는 시간이 나면 굳이 뭘 하고자 몸을 혹사하지 않는다. 뭘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건 침대다. 어쩌면 일상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나보다 더 일상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내가 아내에게 적잖은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건, 그렇게 살아가는 아내가 현실적으로 나보다 이룬 게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열정만 태울 줄 알았지 모은 돈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30대가 되어버린 내 눈앞에 나타난 그녀는, 번듯한 직장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고 스스로 번 돈으로 산 34평 아파트와 차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대출금을 거의 다 갚을 수 있을 만큼의 돈도 저축하고 있었다.


그녀는 '평균 이상의 월급을 받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라는 나의 고정관념을 처참하게 박살 내주었다. 아내보다 더한 사람도 분명 있을 테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비추는 건 생각보다 영향이 셌다. 그녀를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항상 뒤따른다.


'그동안 난 뭘 위해 살아왔나'


그녀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과 그녀의 존재는 내게 일종의 중화가 되는 셈이었다. 그녀를 보다 보면 내가 지닌 완벽주의, 강박증 같은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성향과 성격이 다른 것도 한 몫할 테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위로를 받는 기분이다. 정작 그녀는 내게 위로도 잘하지 않는다. 그것조차도 내겐 위로가 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도 그녀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이런 모양이 되었다. 브런치에 올린 초창기의 글을 지금 읽어보면 느낌이 많이 다르다. 거의 다른 사람이 썼다고 생각될 정도다. 글을 꾸준히 쓰다 보면 누구나 글의 형태가 달라진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요즘의 필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변질됐을지도 모른다.


"글 좋은데?"

와 같은 말은 들어본 적이 손에 꼽는다.


대신 다음과 같은 말은 많이 들었다.

"글이 불친절해."

"오만함이 묻어나는 것 같아."

"내용이 좀 위험한데."

"전개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문장이 너무 길어."


매일 새벽에 일어나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열정 따윈 눈곱만큼도 없이 살아가는 그녀의 조언이 처음엔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한 마디씩 던지는 것들마다 가슴에 콕콕 박히는지,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어도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어도 그녀가 언급했던 부분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렇게 나의 글모양은 조금씩 변해갔다.




요즘은 그렇다.


'꼭 열정적으로 살아야 하나?'


'열정이 없는 건, 열정이 없는 게 아니라 혹시 다른 어떠한 상태를 일컫는 건 아닐까?'


'나처럼 열정을 불태우질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도 있는 반면에, 없는 열정을 끌어올릴수록 되려 악영향만 받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럼 열정은 뭐지?'


아내가 아니었다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사유들이다.


느닷없이 내 앞에 나타난 그녀에게서 난, '적당함'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줄 알았지만 실제론 좁디좁았던 내 시야의 한계를 깨우칠 수 있었던 건, 세상을 어떻게 보든 개의치 않는 아내를 만난 덕분이었다.


열정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어쩌면 난,

'대충'이라는 단어를

너무 대충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에세이 출간 소식

저의 첫 에세이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의 펀딩을 시작했습니다. 결혼의 본질인 '서로 잘 지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 저희 부부만의 독특한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결혼을 망설이는 분, 예비부부, 신혼부부,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향하는 분들에게 추천드리며 또 그런 분들에게 선물하기에도 좋은 책입니다.


많은 후원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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