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지지 않기로 했다
달리는 걸 '달리기'라고 하던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러닝(Running)'이라고 언급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러너(Runner)들은 참바다 유해진이나 지누션에 션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젠 주변에서 너도 나도 러닝한다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독서모임에서도 종종 러닝크루 모집글이 올라온다. 낚시와, 캠핑에 이어 유행의 바통을 넘겨받기라도 한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난 달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유행타는 것일수록 거리를 두는 편이기도 하고, 달리면 무릎이 찌릿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세뇌라도 된 듯했다. 정신 차려보니 아내의 당근 심부름을 하러 가는데 멀쩡한 차를 놔두고 굳이 뛰고 있었다.
확실히 러닝머신과는 달랐다. 힘든 건 매한가지인데 덜 지루해서 그나마 뛸 만했다. 숨도 별로 차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당근 목적지까지 멈추지 않고 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오랜만에 뛰다 보니 불현듯 옛 생각이 났다.
사실 난 러닝, 아니 오래달리기는 자신 있었다. 군 복무 시절 체력 좋은 애들을 한데 모아 오래 달리기를 했는데 그중에서 2등을 할 정도였다. 물론 처음부터 잘 뛴 건 아니었다. 훈련병 시절 매일 아침마다 1.5km를 뛰는 것조차 죽을동 살동 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오래달리기에 자신감을 갖게 된 건, 한 가지 깨달음을 얻으면서부터였다.
어느 날, 느닷없이 체력이 좋아 보인다며 오래달리기 대표로 차출당했다. 훈련병 때 이후론 더 이상 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이후 주기적으로 오래달리기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죽을 맛이었다. 그간 체력이 늘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뛰기만 하면 금세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연습을 거듭해도 좀처럼 늘지 않았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래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난 어김없이 항상 멈추던 구간에서 슬슬 멈출 각을 재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달리지 못할 만큼 숨이 찬가?'
아니었다.
'뛰지 못할 만큼 다리가 아픈가?'
다리는 멀쩡했다.
'근데 도대체 왜 멈추려는 거야?'
마땅히 둘러댈만한 게 없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달릴 때마다 나를 멈추게 만든 건 부족한 체력이 아니라, 멈추고 싶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생각을 한 번 무시해보기로 했다.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지 생각을 무시했을 뿐인데, 5km든 10km든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체력탓을 한 게 머쓱할 정도로 체력은 남아돌았다. 끝이 보일 때면 전력으로 달릴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난 생각이 부리는 술수에 넘어가지 않게 되면서, 오래달리기에 잔뜩 자신감이 붙게 되었다.
다만,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라 이젠 진짜 체력이 안 되서 달리는 게 힘들 줄 알았다. 숨도 차고 다리도 아플 줄 알았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숨도 별로 차지 않고, 다리도 괜차, ㄴ...
다리야?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난 걷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10년 만에 갑자기 뛰는데 잘 될 리는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괜히 오기를 부렸나 싶으면서, 그간 흐른 세월이 간극이 실감되기도 했다. 생각을 무시하는 근력이 많이 약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냥 다시 뛰었다.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멈췄다. 그래도 다시 뛰었다. 그러기를 거듭 반복했다. 예전처럼 오래달리기 대회를 하는 것도 아니니 몸이 버틸 때까진 계속해서 뛰면 될 일이었다. 멈추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게 중요했다.
글쓰기를 그리 했듯,
인생을 그리 헤쳐왔듯,
멈추고 멈춰도 다시 뛰었다.
생각이 지멋대로 몸을 멈추면, 나도 생각이 알아차리기 전에 몸을 먼저 움직였다. 찰나의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은 온전한 내 것일 수 없지만, 정신과 영혼이 살아있는 한 내 몸은 엄연히 내 것이었다. 그 어떤 저의도 없는 한낯 바람일 뿐인 일개 생각따위에 지지 않기로 했다. 결국 난 아내의 당근 심부름을 달리기로 시작해서 달리기로 매듭지을 수 있었다.
달리기를 멈추려는 생각에 지지 않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그보단, 길목에 놓인 공유 킥보드에 QR코드를 찍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게 진짜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