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실패앞에 작아졌을때

이상한 골목 상인

by 아르칸테

비교와 열등감이 나를 잠식하던 시절

모의고사 성적표는
생각보다 조용한 종이였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나는
담임 선생님이 배부른 한숨을 쉬는 소리,
옆에서 누군가 성적표를 접는 소리,
뒤에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를
순서 없이 들었다.

그러다
내 이름이 적힌 한 줄에
눈이 꽂혔다.

등수, 백분위, 그래프.

수학 점수 옆에는
붉은 펜으로
작게 이런 글씨가 적혀 있었다.

“노력 대비 아쉽다.”

나는 그 한 줄 때문에
성적표 전체가 시커멓게 느껴졌다.

교실 밖으로 나오는 길,
복도 끝에서
민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야, 너 이번에 떴다며? 장난 아니네.”

“아, 뭐… 운이 좋았지.”

민수는 늘 그런 식이었다.
자신을 크게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결과는 항상 좋았다.

누군가가 민수의 성적표를 빼앗듯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와, 이 정도면 진짜 인서울 무난하겠다.
야, 너는 걱정 없다, 걱정 없어.”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나를 향한 판결문처럼 들렸다.

“넌 걱정 있다.”

그런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속삭였다.

나는 성적표를 세로로 한 번 접었다.
그리고 다시 가로로 접었다.
작은 사각형이 된 종이를
주머니 안 가장 깊은 곳에 구겨 넣었다.

마치
종이를 접는 게 아니라
나를 접어 넣는 것처럼.

학교를 나설 때
하늘은 맑았다.
억울할 정도로.

나는 괜히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애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중에 몇 명이나
지금 기분 더럽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내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근데 너만 이렇게 구겨져 있잖아.”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
골목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

몇 번이고 오고 갔던 그 길이었다.
화가 났을 때,
상처받았을 때,
도망치고 싶을 때.

그날은
도망치기보다는
사라지고 싶었다.

이렇게 작아진 나를
아무도 보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
어느새 익숙해진 풍경이 나를 맞았다.

낡은 천막,
삐뚤게 세워진 나무 상자들,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정체 모를 물건들.

상인은
작은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고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특별히 놀라지도 않고
그냥 천천히 인사를 건넸다.

“왔구나.”

나는 대답 대신
옆에 놓인 박스에 털썩 앉았다.

상인은 잠시 내 얼굴을 보더니
고치던 물건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누구랑 싸웠니?”

나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사람이랑 안 싸웠어요.”

“그럼?”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

“…나랑 싸웠어요.”

상인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희귀한 손님이 왔구나.”

나는 성적표를 꺼냈다.
몇 번 접힌 종이는
이미 구겨져 있었다.

상인은 종이를 펼쳐보지도 않고
그냥 내 손에 들린 모양만 한 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어디가 제일 아프냐?”

나는 성적표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요.”

실제로는
그 부분엔 아무 글씨도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종이의 정중앙을 가리키고 있었다.

상인은 피식 웃었다.

“그래,
보통은 숫자를 가리키는데
넌 가운데를 가리키는구나.”

“그게 무슨 뜻인데요.”

“숫자가 문제가 아니란 뜻이지.”

나는 결국 성적표를 펼쳤다.
상인은 대강 눈으로 훑어본 뒤
어깨를 으쓱했다.

“나쁘지 않은데.”

“장난해요?
반에서 저만 떨어졌는데.”

“저만.”

상인은 그 두 글자를 또박또박 따라 불렀다.

“그 말 속에
오늘 네 병이 들어 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병이요?”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교병.”

나는 버럭 말했다.

“비교하는 게 뭐가 나빠요?
세상은 다 비교잖아요.
성적도, 실력도,
대학도, 연봉도…
다 순위매기는 거잖아요.”

상인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나무 상자 아래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낡은 쇠줄자였다.

겉면의 페인트는 벗겨졌고,
숫자 눈금도 군데군데 닳아 있었다.

“이게 뭔지는 알지?”

“줄자잖아요.”

“그래.
길이를 재는 도구다.”

상인은 줄자를 살짝 잡아당겼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금속 줄이
허공으로 뻗어나갔다.

“비교는 말이야,
이 줄자로
네가 아닌 사람의 다리를 재고
그 길이에 맞춰
네 발걸음을 욕하는 거다.”

나는 이해가 잘 안된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상인은 줄자를 탁탁 치며 말했다.

“민수의 성적,
누군가의 합격,
누군가의 집,
누군가의 얼굴,
누군가의 인맥.

너는 그 사람들의 길이를 재서
그 옆에 서 본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나는 왜 이렇게 짧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상인은 줄자를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근데 준호야,
이 줄자는 원래
타인을 재라고 만든 게 아니다.”

“그럼요?”

“네가 오늘보다
얼마나 멀리,
얼마나 단단하게
걸어갔는지 재라고 있는 거다.”

나는 줄자를 내려다보았다.

손에 쥔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괜히 신경 쓰였다.

“근데…
저보다 멀리 간 사람을 보면
그냥… 작아져요.”

그 말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같이 출발했던 애들이
먼저 앞질러 가는 것 같고,
나는 늘
뒤에서 헉헉대는 것 같고…”

목이 조금 메었다.

“굳이 안 비교하려고 해도
보이잖아요.
점수도, 결과도.
안 보려고 해도 보여요.”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보인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비교는
‘보이는 세계’에서 시작되지만
열등감은
‘해석하는 세계’에서 자란다.”

나는 그 말을 되뇌었다.

“보이는 세계…
해석하는 세계…”

“사실만 말하면 이거다.

민수는 이번에 잘 봤다.
너는 이번에 떨어졌다.

여기까지는
그냥 날씨예보 같은 사실이다.

그런데 너는 거기에
이런 해석을 붙였다.

‘나는 뒤처진 인간이다.’
‘나는 안 될 놈이다.’
‘나는 노력해도 안 되는 타입이다.’”

나는 움찔했다.

그 말들은
이미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호야,
이게 바로
비교가 아니라
‘자기 비하’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나는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말이 새어 나왔다.

“…근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상인은 내 표정을 뚫어지게 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너,
이번 시험 전에
공부 얼마 했니?”

나는 잠시 눈을 돌렸다.

“…솔직히 말해요?”

“가짜 답을 하면
가짜 위로를 받게 된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일단…
하린 일이랑
아빠랑 이것저것 꼬인 뒤로
집중 잘 안 됐고요.

학원은 다녔는데
집에 와서는
솔직히 폰 많이 했어요.

유튜브 보고,
게임 좀 하고…

교과서 펴면
금방 잠 오고…”

말하다 보니
내가 내가 봐도
대충 산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히 죽어라 한 건 아니에요.”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사실은 이거다.”

상인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1. 어떤 애는 죽어라 했다.
2. 너는 죽어라까지는 안 했다.
3. 그래서 그 애가 더 잘 봤다.”

상인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덧붙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되게 심플한 이야기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너는
이 위에다가 이렇게 덧칠을 한 거야.

‘나는 재능이 없다.’
‘나는 머리가 나쁘다.’
‘나는 항상 뒤처진다.’
‘나는 원래 이런 애다.’”

상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이건 사실이 아니라
‘선언’이다.”

“…선언?”

“그래.
지금 네가 스스로에게 내린
일종의 판 결 문 인것이지.

그리고 무서운 건
이런 판결문은
한 번 내리면
네가 스스로를 그렇게 취급하기 시작한다는 거야.”

나는 줄자를 쥔 손에
조금 힘을 줬다.

“그럼…
저는 지금
사실을 본 게 아니라
저를 줄인 거예요?”

상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너를 직접 줄인 거다.”

나는 억울해서 말했다.

“근데…
비교 안 하고 어떻게 살아요.
세상은 다 비교인데.”

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비교 자체는 나쁘지 않지.
문제는
비교를 ‘기준’으로 쓰느냐
‘도구’로 쓰느냐다.”

“차이가 뭐예요?”

상인은 내 손에 쥔 줄자를 가리켰다.

“기준으로 쓰면,
너는 항상
타인의 길이에 맞춰
너를 잘라내고.

도구로 쓰면,
‘아, 저 정도까지 갈 수 있구나’
하고
자기 길을 설계하는 데 쓸 수 있지.”

상인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비교는
네가 못났다는 증거가 아니야.
그저
‘아, 저기까지 가는 길도 있구나’
라는 지도일 뿐이지.

지도 보고
자기 자리를 욕하면
길을 못 간다.”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럼
전 지금 뭘 해야 돼요?”

상인은
줄자를 내 손에서 다시 가져와
탁, 하고 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네 길이를 먼저 재라.”

“제… 길이요?”

“그래.
소풍 가기 전에
친구들 도시락 열어보는 것보다
네 도시락부터 챙기는 게 순서잖니.”

상인은 손가락을 하나씩 세며 말했다.

“어제의 너,
일주일 전의 너,
한 달 전의 너.”

“그때의 너랑
지금의 너를 비교해봐라.

집중력,
공부한 시간,
도망친 횟수,
포기한 순간들.”

상인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그 비교에서
지금의 네가 더 용감해지고,
조금이라도 더 버티고,
조금이라도 더 깊이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성장.

등수가 말해주지 못하는
진짜 성장.”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근데
전 그냥
한 번에 잘하고 싶어요.”

상인은 웃었다.

“그래서 지금
작아진 거야.”

“한 번에 잘하지 못하는 나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상인은 말을 이어갔다.

“준호야,
실패는
‘너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너는 아직 배우는 중이다’
라는 표시다.”

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아직
배우는 중이다.

아직.

“근데요…”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도
앞서가는 애들 보면
불안해요.
저만 뒤처지는 것 같고…”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해지는 건 당연하지.
문제는
그 불안을
너를 채찍질하는 도구로 쓸 건지,
네 자존감을 찢어버리는 칼로 쓸 건지.”

선택은~ 음 자 이거봐라.

상인은 상자 한켠에 있던
작은 깡통을 들어 보였다.

“봐라.
이 안에 돌멩이 하나 넣고
흔들면 시끄럽지?.”

상인은 깡통 안에
작은 돌멩이를 하나 넣고
좌우로 흔들었다.

깡통 안에서
딸깍딸깍 소리가 났다.

“불안은
이 돌멩이 같아.
그냥 놔두면
머릿속을 시끄럽게 한다.

근데 이걸
‘아, 내가 더 준비해야겠구나’
하는 신호로 쓰면
이건 알람이 되버리는거지.”

상인은 깡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준호야,
열등감은
비교에서 태어나지만
머무르는 곳은
네 해석 속이다.

비교를 없앨 수는 없지만
해석을 바꾸는 건
네 몫이다.”

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상인은 내 침묵을 기다려주고 나서
줄자를 다시 내 손에 올려주었다.

“이건 오늘 너에게 주는 물건이다.”

나는 놀라서 상인을 쳐다봤다.

“저… 가져가도 돼요?”

“그래.
이 줄자를 볼 때마다
남의 다리부터 재지 말고
어제의 네 발걸음부터 재라.”

상인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기억해라.
실패 앞에서 작아지는 건
네가 못나서가 아니라
네가 아직
‘너만의 길이’를
발견하지 못해서다.”

나는 줄자를 꼭 쥐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오늘 내가 진짜 지고 온 건
시험이 아니라
비교 속에서 줄어든 나였다.

골목을 나서며
나는 줄자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종이처럼 나를 접어 넣던 그 주머니에
처음으로
나를 다시 펼칠 수 있는
작은 도구 하나가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은 여전히 얄밉게 맑았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이미 멀리 가 있고,
나는 아직 여기 있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솔직해졌고,
조금 더 인정했고,
조금 더 배우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

비교와 열등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날 이후로
나는 아주 조금씩
타인의 길이가 아니라

내가 걸어갈
자기 길이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