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단단해진 것 같지만 두부일지도 모르는

완벽한 나만의 무균실 안에서

by 최서연



“설거지 좀 해놓지 그랬어.”


엄마의 야멸찬 목소리를 듣고는 마음이 으깨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정말 많이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처럼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모두에게 날을 세우고, 다 나를 싫어해도 상관없다는 악에 받친 마음으로, 뾰족하게 굴 때와는 다른 마음 같았다.


‘뾰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물렁물렁해서 맨날 망가져버리는 것은 아닌, 그런 튼튼한 마음을 이제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가까운 사람한테는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사실 엄마가 예전에 나에게 퍼부었던 말에 비하면 대단히 상처 받을 말도 아닌데 마음이 짓이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두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 당시에 나는 생활 반경을 철저히 제한시켜 놓고 살았다. 상처를 받거나, 스트레스받을 일이 썩 많지 않았던 것도, 내가 정말 단단해진 것이 아니라, 그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타리를 확실하게 세워놓고 나는 그 안에서만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받게 하는 친구들은 만나지도, 연락을 하지도 않았고, 정말 마음 터놓고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몇몇의 친구들 빼고는 어떤 모임도 없었다. 일하는 곳은 내가 정해진 수업만 하고 퇴근하면 되는 곳이어서, 다른 강사분들과 많이 친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함께 일하는 매니저님과도 웃으면서 인사하는 정도에서 더 다가가지도 않았다. 수업을 하면서 만나는 많은 회원들 중에 가끔은 내 멘탈을 흔들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만드는 회원들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은 좋은 분들이었고, 다행히도 내 마음 선에서 감싸 안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렇게 강사로 서의 나의 자아는 생각보다 많은 회원님들을 잘 감당해주고, 휘둘리지 않고, 매번의 수업을 잘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충분히 잤고, 충분히 게으름을 피우고, 충분히 딴생각을 하기도, 할 일을 미루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아주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내 생활에 만족하게 되었고, 스트레스로 인한 소비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어떤 투자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정말 내가 필요한 것, 정말 내가 가지고 싶은 것, 정말 내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방법으로 내 하루를 채워나갔고, 그런 하루하루가 충만하고 즐겁고 평화로워서, 통장에는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과 베이글을 사 먹을 돈만 있다면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속이 상할 일도, 걱정할 일도, 스트레스받을 일도, 상처를 받을 일도 없었던 것이다. 완벽한 나만의 무균실을 만들어 놓고, 그 열 평 짓 정도의 방 안에서 걸어 다니다가 잠에 드는 것이 나의 하루였으니까. 그 밖으로 나갈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그 밖으로 나가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늦잠을 자고, 낮에는 자주 가는 카페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베이글을 시켜 먹으면서, 쓰고 싶은 글을 쓰거나 수업을 준비했다. 저녁 수업을 하고, 밤에 집에 와서 스트레칭을 하고 잠이 들었다. 주말에는 엄마와 나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 차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게스트 하우스 청소를 도와주고, 아주 평화롭고 별다를 것 없는 생활 속에서 안전하게만 지내고 있었다. 마음 놓고 만날 수 있는 몇몇의 친구들만 가끔씩 만났고, 만나는 친구들도 정해져 있었다. 나를 공격할 만한 어떤 사람도 만나지 않았고, 만날 필요도 없었고, 만날 일을 만들지도 않았다. 드디어 내가 건강해졌다고, 이제는 더 이상 다치지도 상처 받지도 않을 만큼 튼튼해졌다고, 신이 나서 무균실을 매일매일 똑같이 돌다가 문득, 의심이 들었다.


‘나는 내가 이 안에 있어서 튼튼해졌다고 착각을 한 것일까? 그 안에만 있을 거면 내가 사는 의미가 있나. 나랑 연관된 아주 소수의 몇몇 사람, 나랑 연관된 몇몇 곳만 지구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려도 나는 그냥 없는 사람이 될 텐데, 그래 봤자 아무 일도 안 일어날 텐데, 나의 어떤 움직임이 무슨 의미가 있나?’


예전에 보았던 영화에서 주인공인 산드라 블록이 우주에 혼자 떨어졌을 때, 스크린 너머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한도 끝도 없이 막막했던 그 기분이 떠올랐다. 이렇게 갇혀서 사는 거라면, 그러면서 나 혼자서도 행복하고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살다가 죽는 거라면, 아니 조금 나아가서 내 주변에 정말 소수의 몇몇 사람에게 조금의 따뜻함을 나누면서 살다가 죽는 게 다라면, 범위가 조금 다를 뿐이지 그렇게 망망대해 우주 속에서 혼자 고립된 채로 사는 것과 뭐가 다르지? 나는 행복해진지도 얼마 안 되어서, 또다시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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