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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Jan 19. 2024

5. 드디어 책방이 열립니다

다섯 번째 샘플 편지

안녕하세요, 책방하리의 책방지기 정란입니다. 워낙 오랜만의 편지이다 보니 그동안은 어떻게 말을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지난 편지들을 들추어 보았습니다. 그때그때 열고 싶은 대로 열었음을 확인하고(아, 역시 그랬구나) 편안하게 말을 이어나갑니다.


어제는 서울아산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어요. 오전에는 오른팔의 피를 뽑고, 오후에는 왼팔의 피를 뽑았습니다. 오른팔을 채혈할 때는 팔꿈치로부터 아주 아래쪽의 피를 뽑아서, 세로 8.5cm, 가로 2cm 가량의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팔꿈치 안쪽의 혈관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자주 채혈하지만 한 번도 피가 한 방에 안 나온 적도 없었거든요. 지금 제가 육안으로 봐도 너무 잘 보이고요) 왜 거기서 피를 뽑았을까 생각했는데, 채혈하는 사람이 피 뽑기 좋은 위치였습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싶지 않으니 멍을 볼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요. 하지만 멍 때문에 아프기까지 하니, 이 정도면 미워할 만하다 싶습니다. 환자 한 명 한 명이 지나갈 때마다 그 틈에 휴대폰을 보다가, 다음 환자가 자리에 앉으면 휴대폰을 잠깐 치우고 그냥 기계적으로 피를 뽑는구나 싶었습니다. “피를 여기서 뽑나요?” “(시큰둥하게 소독솜을 문지르며)네” 특별한 다정이나 세심함을 바란 적은 없지만, 이런 무지막지한 채혈이라니 속상했습니다. 수술을 위해 이것저것을 꽂았을 때도 이런 멍은 든 적이 없었거든요.


아무튼 오늘은, 무지막지한 멍을 단 채로 편지를 씁니다. 책방하리는 2023년 11월 12일 일요일에 문을 엽니다. 11월 8일 입동(立冬). 겨울과 함께 문을 열려고 했는데요! 역시나 세계실수선수권대회 참가자답게! 수요일은 책방하리의 휴무일이라는 걸 잊은 겁니다. 그래서 11월 손 없는 날 중 적당한 날, 11월 12일에 문을 열기로 한 것입니다. 11월 12일. 어쩐지 연속성도 느껴지고 좋지 않나요? 11월 편지하리를 구독하셨다면 11월 2일부터는 편지로 미리 만나 뵙게 되겠네요. 따스한 인연을 더 이어나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결된 느낌이 너무 좋네요. ‘이어나가’, ‘연결된’을 쓰면서 절로 미소가 떠오를 만큼요.


그나저나 벌써 다음 주가 입동이라니! 짧은 가을을 잘 보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어제 피곤한 와중에도 자기 전 친구와 잠깐 통화를 했는데요,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제가 있어서 이 짧은 가을을 꽉 채워 살 수 있었다고요. 서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일이 퍽 아름답고 따뜻하지 않은가요? 저는 그 친구가 있어서 이 가을을 그냥 넘기지 않을 수 있었거든요. 지난 주에 아주 놀랍고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건 11월 편지에서 알려드릴게요. 조금 아껴두고 싶은 마음이랍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저랑 생일이 똑같은 호랑이를 발견한 거예요. 친구는 호랑이에게 편지 쓰는 저를 보며 뻔뻔하다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날이 정말 생일 같았거든요. 가을에도 태어날 수 있다니 즐거운 하루였어요.


가을이 8일 남았습니다. 가을과 관련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분하고 긴 시간이에요. 부석사에서 일몰을 보는 것도 근사할 테고, 수목원의 숲길을 걷는 것도 멋질 거예요. 좋아하는 가을 옷을 꺼내입고 동네 흙길을 천천히 산책하는 것도요. 가을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야기책을 읽기 시작하는 건 어떠세요? 문득, 팔에 든 멍도 가을 같다는 생각이 드는 오후입니다.


늘 건강하시길.

그리고 11월 12일이 지나고, 어느 날 책방에서 만나요!


-오늘도 아주 멋진 가을을 보낼 예정인 책방지기 드림






완벽했던 하루의 완벽한 장면




책방지기는 누워 있습니다. 가을하늘 아래 발 뻗고 누워 청설모를 보는 일은 아주 즐거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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