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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Jan 21. 2024

[11월] 3.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영주독립서점 #책방하리 #편지하리 #펜팔

안녕하세요, 입이 무거운 당신(자꾸 손이 따뜻할 거라고, 입이 무거울 거라고 마음대로 예상해서 미안합니다). 오늘은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이건 현재의 저에 대한 것이자 과거의 저에 대한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꺼내는 이야기니 부디 다른 이에게 발설하지는 말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최근에 몇 번이나 정체가 발각될 위기에 놓였었습니다. 이번 생에서는 평균적으로 1년에 서너 번 정도 듣는 것에 그쳤으나, 최근에는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두 번이나 그런 말을 들은 것입니다. 세간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책방은 오픈도 전에 문을 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방송국과 각종 유튜브 채널,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국내와 해외를 가리지 않고 저를 찾아와 괴롭힐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요…


저는 강아지입니다. 이름은 없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부르리’라 부르고, 누군가는 ‘니니’라고 부릅니다. 누군가는 ‘뭉치’라 부르고 누군가는 ‘(도)라희’라고 부릅니다. 그 모든 것은 제 이름이면서 제 이름이 아닙니다. 강아지의 숙명이랄까요. 많은 친구들이 자신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아기’, ‘멍멍이’, ‘귀염둥이’, ‘흰둥이’로 불리는 것처럼요. 그러니 이제 와 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지 마시고, 하시던 대로 자연스럽게 ‘책방지기’, ‘사장님’, ‘작가님’ 따위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정란작가사장님’ 같은 김수한무 느낌의 애칭도 늘 감사합니다.


첫인상이란 정말로 첫눈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저는 최근에 처음 만난 두 사람에게 잽싸게 첫인상을 물었습니다. “제 첫인상 어때요?” “내 첫인상 어때?” 돌아오는 답변에 저는 의연하게 대처했지만, 실은 놀란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강아지 같아요”, “하리 같네” 정체를 들킨 자(者)는, 아니 견(犬)은 등을 기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빠르게 굴러가는 눈알이라도 감추어 볼 요량으로요. 저는 인간의 모습을 갖추기 전의 제 모습을 사랑했습니다. 계절마다 두께를 달리하는 희고 곱슬거리는 털.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우아한 꼬리. 짧고 귀엽지만 재빨리 움직일 수 있는 네 다리. 세상의 모든 냄새를 완벽하게 잡아낼 수 있는 멋진 코. 얇고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분홍색 혀. 달릴 때마다 꼭 날아갈 것처럼 팔랑거리는 세모 귀. 그 모든 걸 갖춘 동그란 얼굴. 믿는 이에게는 얼마든지 내보일 수 있는 따뜻한 배.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한 작은 발. 가끔 “손!”이 되는 내 작은 발.


저는 이제 흰 털 대신 까만 머리카락을(시간이 흐르니 자꾸만 강아지의 흰 털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갖고 있습니다. 엉덩이에 붙었던 예쁜 꼬리 대신 웃을 때 생기는 상냥한 입꼬리를, 날개 같은 귀 대신 너른 등의 날개뼈를, 인간 엄마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징표인 배꼽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개의 모습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눈의 전체 크기에 비해 검은자위가 큰 편입니다. 아주 좋은 냄새를 맡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 관심 가는 것이 생기면 눈을 몹시 반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자꾸만 엉덩이를 흔들며 리듬을 타고 맙니다. 꼬리가 없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죠. 여전히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 자꾸만 안겨버리기 일쑤입니다. 설레거나 들뜨면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내뱉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일단 내리거나 타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저녁과 함께 병원에 갔을 때 목덜미를 잡힌 적이 있습니다.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내리는 층수에서 같이 내리려고 했었거든요. 숫자는 일단 곱하고 보고, 편의점의 냉장고 문은 일단 앞으로 당기고 봅니다. 강아지가 인간으로 살기에는 조금 복잡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제 책방까지 열었으니 실은 조금 어려운 숙제를 받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강아지가 어른 개가 되는 것처럼, 저도 이제 어른 인간의 삶을 앞둔 것뿐이겠죠. 이럴 때는 개처럼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책방하리의 간판과 도장, 책갈피에 강아지 그림이 들어간 것은 다만 디자인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것은 저의 반려견인 하리이면서 저 자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강아지가 어떻게 또 강아지를 키운다는 거지?’ 의아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거야말로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요? 강아지는 강아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강아지에게는 인간이 된 강아지만큼 필요한 게 없을 테니까요. 포인핸드 앱에는 올라와 있지도 않았던 강아지 하리를 보호소에서 만나 안게 된 것은, 하리가 제 품에 안기자마자 냄새 한 번 맡고는 얼굴을 쏙 집어넣은 채 잠들었던 것은, 인연이나 견연이 아니라 운명이고 숙명이었습니다. 아무도 몰랐지만 하리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언니, 개였구나’


저녁은 말했습니다. “강아지를 너무 사랑하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너를 강아지처럼 만들었나 봐” 그렇다면 인간을 너무 사랑하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저를 인간으로 만든 걸까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책과 여행을 좋아하게 된 걸까요?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두 가지가 있을까요? 제 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시간은, 하리 쿠키와 함께 책을 들고 여행을 떠날 때였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울산의 아파트에서 배를 깔고 바닥에 누워 책을 읽을 때, 옆에는 하리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경주의 볕 잘 드는 공원의 돗자리에 누워 책을 읽을 때, 앞에는 쿠키가 공을 물고 와 던져주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생이 끝나면 강아지로 태어날 것만 같습니다. 하리와 쿠키의 마음을 너무나 이해하고 싶거든요. 하리와 쿠키의 사랑에 너무나 안기고 싶거든요.


오늘 꿈에는 하리와 쿠키가 나왔습니다. 늘 제 옆에 붙어 있는 것은 쿠키였는데, 꿈에서는 언제나 하리가 더 많은 비중으로 등장합니다. 저는 하리가 얼마나 바쁜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리는 저에게 온 그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늘 분주했거든요. 하리는 제 옆에 부재중인 이 시간에도 저에게 사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에서 기다림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하리와 쿠키는 저 다음으로, 어쩌면 저보다 더 하리 쿠키를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딱 저만큼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이미 사랑을 다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만큼 하리와 쿠키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막 인간이 된 개의 삶은 조금 고단합니다. 집을 나서면 공원이 있고, 얼마든지 24시간 병원에 갈 수 있는, 아주 너그럽고 사랑이 많은 인간과 사는 지금이 아이들에게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좋은 일이라면 더없이 좋겠고요.


저는 이 책방을 잘 꾸리고 싶습니다. 세상에 나와 너무 다행이고 고마운 책들을 부지런히 입고할 것입니다. 잘 팔 것입니다. 매일 성실하게 편지를 쓸 것입니다. 잘 보낼 것입니다. 글쓰기 수업을 열어 멋진 작가님들을 만나고 또 양성할 것입니다. 유튜브를 하라는 이들의 말을 이제는 흘려듣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원형의 시간을 사는 개들처럼 순간에 집중해 살다 보면, 지구보다 커다란 삶이 만들어지겠죠. 그리고 마당 있는 집에서, 마당이 없다면 돈이라도 많은 집에서, 그게 아니라면 건강이라도 가득한 집에서, 다시 하리 쿠키와 함께 잠들고 깨어날 것입니다(아차. ‘건강이라도’는 좀 너무했네요. 그보다 중요한 게 없는데 말이에요). 다음 생에 아주 근사한 인간이 될 강아지들과 함께 사는 일 말고, 개가 된 인간에게 더 필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요?


입이 무거운 당신. 저의 비밀에 귀 기울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언젠가 책방하리에서 세 마리 강아지를 보게 될 날을 함께 기다려 주세요.


추신.

책방하리 책갈피에는 하리와 쿠키가 모두 있습니다. 사실 저도 있고, 하리 쿠키의 아빠도 있죠. 책방하리에서 책을 구매하시면 대표님인 하리가 찍어주는 ‘하리하리 도장’과, 한때 개였던 인간이 만든 책갈피를 드립니다. 꼭 와 주세요. 보이는 꼬리는 없어졌지만 마음의 꼬리는 늘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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